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영진 Nov 17. 2019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다

3개월 증후군의 습격

부킷빈탕,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




슬럼프는 자기성찰의 기회다


복병이 들이닥쳤다. 장기 여행을 할 때마다 나를 괴롭혀 온 3개월 증후군이었다. 먼 길을 나설 때마다 3개월의 전후 지점에서 소진 현상이 일었다. 며칠 간격으로 맞닥뜨리는 새로운 환경, 반복되는 여행의 일상, 숨 돌릴 새 없이 다시 엄습하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 부실한 관계망에서 비롯한 외로움 등에 계속 시달리다 보면 심신이 시들시들해졌다. 희망과 기대를 품고 오른 여정임에도 한국을 떠나온 지 3개월 무렵이 되면 내가 왜 비싼 돈과 귀한 시간을 들여가며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를 반문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마주치곤 했다. 여행이 위기에 봉착했다는 신호였다.  


그 무렵이 되면 명성이 자자한 볼거리들은 형태만 바뀌는 듯 느껴지고, 감각을 일깨워주던 풍경들은 시시해 보였으며, 날마다 반복되는 일과는 허무하기만 할 뿐이었다. 무력감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덩실덩실 널을 뛰었다. 넘치던 의욕은 온데간데없고 불안정한 감정이 일상을 지배했다. 소문난 볼거리를 아무리 열심히 찾아다녀 보아도 흥은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사소한 풍경에서조차 경이로움을 발견해 내던 눈동자는 어느새 탁해진 상태. 머리는 이 또한 새롭고 신기한 장면이라 말했지만 아무리 보아도 세상은 텅 비어 보일 뿐이었다. 3개월 증후군에 번번이 시달렸기에 과거에는 아예 여행 기간을 3개월로 못 박아 두고 여행을 하기도 했다. 


여행 일정을 헤아려 보니 권태가 찾아온 시점은 이번 여행을 시작한 지 3개월이 거의 임박했을 때였다. 며칠 단위로 이동을 반복하는 과거의 여행들과 달리 한 도시에 오래 머무는 여행을 하는 만큼 이번에는 3개월 증후군이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예상을 비껴갔다. 한 곳에 오래 체류하다 보니 자주 다니는 길목은 익숙했지만 아직도 지역에 대해 모르는 것이 태반이었다.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며칠에 한 번씩 낯선 도시와 부딪쳐야 하는 여행에 비해 몸이 조금 덜 피곤했을 뿐, 여전히 생소한 지역 문화, 현지 사회 환경에 대한 무지, 비용과 생활 도구의 한계 등이 매일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상 이동하는 여행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과거에 비해 3개월 증후군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는 것. 여전히 그 기세가 과격하기는 했지만 예전에 비해 그 위력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최근의 장기 여행들에서 3개월 증후군과 적극적으로 씨름했는데 그 같은 노력들이 맷집을 키워준 듯했다. 내면의 상태는 연일 어수선했지만 할 일은 꼬박꼬박 하고 있었으니 과거에 비하자면 꽤 선방하고 있는 셈이었다. 


3개월 증후군에 시달리는 동안 브루나이, 스리랑카, 몰디브 3국 여행을 다시 떠올렸다. 어쩌면 변화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눈 딱 감고 여행을 밀어붙일까 싶었다. 한 달쯤 3국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울이 3국 여행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상념에 잠겼다. 한 지역에서의 체류 기간이 길 뿐 이미 나는 여행 중인데 여기서 또 여행을 한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애써 선택한 고독 여행인데, 더욱이 과거의 여행들과는 경험의 차원 자체가 다른 여정 속에 있는데 스스로에게 집중하기에 최적화된 이 고요한 흐름을 갑자기 끊어도 괜찮을까? 혹시 3개월 증후군의 괴로움에서 도피하려고 여행의 명분을 급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잔꾀를 부리기보다는 힘을 다해 상황에 맞서는 게 낫지 않을까? 버겁기는 하겠지만 미래를 위해 경험치와 전투력을 조금이라도 높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3국 여행 계획을 다시 접기로 했다. 현명한 판단이 아닌 듯했다. 내 안에서 도피 심리가 고개를 쳐들었다는 사실도 확실히 느꼈다. 괴로운 나날이 계속되니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어진 듯했다. 과거의 여행들 중 그럴싸하게 포장한 도피 여행도 몇 차례 있었던 터라 내 욕망이 어느 방향으로 튀고 있는지 감별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오로지 도피를 목적으로 오른 여행들은 아니었지만 주요 동기 중 하나는 분명히 도피 심리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이 약간 다르기는 해도 맥락을 가만히 살펴보면 3국 여행의 욕망은 과거의 도피 여행들을 추동한 욕망과 거의 비슷했다.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여행의 목적도, 흐름도 그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었다. 


당초 계획한 쿠알라룸푸르의 체류 기간은 한 달 정도였지만 괜찮겠다 싶으면 더 머무는 복안을 마련해 두었다. 계속 머무를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지 여부를 두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쿠알라룸푸르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작업 환경이 그리 좋지 않은 데다가 현지에서 할 수 있는 경험은 어지간히 했다. 여행자 숙소를 3개월 간 생활공간으로 이용했으니 당초 예정대로 숙박의 형태도 바꾸는 게 좋을 듯했다. 항로를 재설정했으니 이제 새로운 방향을 향해 키를 틀어야 할 차례였다.




# 장기 여행의 슬럼프

슬럼프는 장기 여행자의 상당수가 겪는 현상이다. 상황이나 성향에 따라 단기 여행자도 슬럼프를 겪을 수 있지만 며칠만 인내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입장이 장기 여행자와 다르다. 여행의 중턱에서 맞이하는 슬럼프는 파괴력이 상당하다. 의지할 이도 없고, 현지 사정도 낯설다 보니 추락의 속도도 빠르고 낙폭도 깊다. 그렇다고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기도 쉽지 않다. 슬럼프의 등에 떠밀린 귀국을 바람직한 선택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주 극악한 상황이 아닌 한 슬럼프를 이겨내는 연습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여행과 인생은 많이 닮았다. 여행자마다 슬럼프를 극복하는 해법은 다를 것이다. 저마다의 기질과 특성에 맞춰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게다. 그러자면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하나씩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보편적인 해법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인간은 동일한 생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슬럼프 극복에 도움이 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심신의 안정이다. 슬럼프가 다가오는 것 같다고 판단된다면 피로가 누적될 만한 활동을 자제하고 충분한 휴식을 통해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게 좋다. 대자연 속에서의 휴식은 가장 훌륭한 처방전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과 그에 따른 조치의 결과를 갈무리해 두면 다음에 슬럼프가 찾아왔을 때 좀 더 요령 있게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전 17화 분명한 의사 표명은 결례가 아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