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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나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과연 나로서 존재하는가

KLCC,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




내가 아는 나를 나의 전부로 단정 짓지 말라


아수라장이 된 숙소의 상태는 변화의 욕구를 점점 더 자극했다. 숙소의 운영 환경을 세세하게 간파한 상태라 불필요한 충돌은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고, 때문에 개인적인 일상에도 큰 불편은 없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혼돈의 풍경을 날마다 구경하는 심정이 평온할 리 없었다. 내 안 어딘가에서 변화의 욕구가 파고를 높이고 있는 와중에 불현듯 짚이는 게 있었다. 생활환경의 혼란에서 연유한 줄 알았던 변화의 욕망이 사실은 그전부터 출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쿠알라룸푸르에 닻을 내린 직후, 현지에서 열리는 카우치서핑 주간 이벤트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현지인과 여행자 등 총 20여 명이 함께했는데 분위기는 나름 화목했다. 첫 만남이 으레 그렇듯 반복되는 자기소개와 여행을 소재로 한 상투적인 대화는 지루했으나 적극적인 교류 의지를 발휘한 덕분에 몇몇 참석자와 마음이 맞닿았다. 그렇지만 이렇다 할 목적의식 없이 유희에 집중하는 자리이다 보니 의미 있는 소통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심리학을 전공한다는 스페인 여행자 하나가 꽤 통하는 느낌으로 다가왔음에도 주변이 너무 소란스러워 대화를 진전시킬 수 없었다. 현지 생활에 필요한 정보도 얻고, 마음 맞는 친구도 사귀어 볼까 해서 찾아간 자리였는데 귀가 너무 따가워 중간에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카우치서핑 주간 이벤트가 다시 열렸다. 지난번의 피로했던 장면이 떠올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 행사 개최 시간이 저녁 식사 시간과 겹치기에 현지인이 즐겨 찾는 맛집도 새로이 알아둘 겸 일단 참석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 재미없으면 그때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로 했다. 자신만의 관점이 있는 여행자와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오늘은 괜찮으려나 싶었던 모임의 분위기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고 가는 대화도 재미가 없는 데다가 제대로 맞닿은 이도 없었다.


참석자들은 여행에 대한 강박증 환자들 같았다. 여행은 너무나도 멋진 일이라고 입을 모으면서도, 또한 여행 중인 자신의 상황이나 과거의 여행 경험들에 엄청난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그에 대한 근거를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유를 되묻는 이도 없었다. 여행은 멋진 것이고, 여행하는 나는 근사한 존재라는 도식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듣고 싶었으나 아무도 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러한 경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참석자는 쿠알라룸푸르 현지의 국제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미국인 여성이었다. 미국은 지금 한파가 몰아치는데 나는 지금 그 한파를 피해 따뜻한 지역에 와 있으니 여행은 너무나도 멋진 것 아니냐는 둥, 미국에 사는 지인들은 고생스럽게 일하고 있는데 나는 여행지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거야 말로 멋진 상황 아니냐는 둥 낡고 진부한 여행 예찬만을 반복했다. 추위를 피해 감행했다는 쿠알라룸푸르행이 도피 심리에서 유래한 것은 아닌지, 여행이라는 세계 안에서 비교 심리를 발동하는 게 옳은 일인지, 타인의 고생스러움과 대비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인지에 대해 고민한 흔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녀가 내뱉은 모든 말은 여행은 찬란한 것이라는 외침으로 끝났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목소리도 활기차고, 웃음도 많은 그녀였지만 그런 모습들 역시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매력적인 인상을 풍기고 싶어서 열심히 역할극을 하는 듯 보였다. 속마음을 숨기고 쉴 새 없이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에서 낮은 자존감도 언뜻언뜻 비쳤다. 온갖 과장된 언행을 서둘러 늘어놓으면서 이목을 끌고 싶어 하는 모양새로 보아 외부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성향의 소유자인 듯했다. 


어수선한 행동을 반복하는 이는 그녀 하나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복병은 가장 시끄러운 태도로 여행 찬가를 부르짖던 인도네시아 사내. 지난번 이벤트에도 참석했던 친구였는데 그때는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어서 꽤 호탕하고 시원시원해 보이는 겉모습만 발치로 경험했다. 불안증의 흔적이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대화를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상태여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대화를 나눠 보니 불안증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모임의 시작과 동시에 그는 주변의 대화들에 쉴 새 없이 뛰어들고 있었다. 그 목소리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여행지의 이름이 언급되면 미친 듯이 대화 속으로 달려들어 그 나라의 가봐야 할 곳들을 목청 높여 읊었다. 끊임없이 대화 장악을 시도하면서 발언의 양을 늘리기에 바쁜 모습. 한 나라에 대한 브리핑이 끝나면 다른 나라를 다시 거명하면서 시끄럽게 여행지 목록을 나열했다. 그러다가 정적이 흐르면 반대쪽 좌석으로 고개를 돌려 대화의 흐름을 잠시 살피다가 빈틈이 생기기가 무섭게 이야기 속으로 돌진했다. 그러고는 다시 장황한 말잔치.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목청을 다해 나 여기 있음을 외치는 그의 모습 위로 소외의 두려움에 떠는 어린 소년의 형상이 피어오르고 사그라들길 반복했다. 꽤 불안하고 외로워 보이는 그였다. 


2차로 옮긴 편의주점에서 혹시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려나 하는 마음으로 인상이 좋은 현지 카우치서퍼 하나에게 말을 걸었다. 현지 카우치서핑 문화의 이모저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첫 5분 정도는 대화가 편안했다. 주최자들의 친절도나 성실성으로 보자면 쿠알라룸푸르의 카우치서핑 문화는 꽤 건강한 편이었다. 타국에서 온 여행자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모습들에서 크나큰 선의가 엿보였다. 문화가 꽤 안정적으로 정착한 듯해서 그 이유와 과정을 그녀에게 물었더니 현지 멤버들이 들이고 있는 노력과 운영 방향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돌아왔다. 거기까지는 대화 분위기가 좋았다. 


설명을 끝낸 직후, 그녀와 나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자 그녀가 휴대폰에서 자신의 여행 사진을 끄집어 내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여행 이력이 딱히 궁금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내가 자신의 여행을 궁금해하는지 여부는 고려하지 않은 채 휴대폰에서 끊임없이 과거의 여행 사진들을 들추며 자신의 여행 경험을 읊었다. 의도되지 않은 찰나의 침묵이 불안감을 불러일으킨 듯했다. 그녀가 몹시 친절한 성향의 소유자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만물상회식 나열이 이어진 30분 간의 말 고문은 그저 지루하기만 할 뿐이었다. 인도네시아 사내, 미국 여성, 현지 여성 셋 모두와 편안한 대화를 나누는 데 실패했다. 선량해 보이는 친구들이었지만 대화는 한없이 답답했다. 더는 못 있겠다 싶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숙소로 돌아왔다.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의 허구성을 깨달으면서 여행의 궁극적인 초점을 나다움을 회복하는 데 맞춰 둔 상태였다. 때문인지 타성에 잠식된 현상들이 시야에 꽤 선명하게 포착되고 있었다. 성찰 없이 받아들인 관습들, 습관적으로 행하는 타율적 행위들이 시끄러운 진동으로 내 주변을 어지럽히는 중이었다. 그럴수록 나다움의 갈망이 키를 더 키웠다. 돌아보면 나 또한 외부에서 이식된 관념의 축적물이자 인습의 낡은 창고이기도 하기에 위기의식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카우치서핑 모임이 그러한 의지를 더욱 자극했다. 그러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마저 아수라장이 되었다. 변화를 촉구하는 내 안 어딘가의 북소리가 데시벨을 점점 더 높여가고 있었다.




# 자기실현과 투사

우리는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기도 하지만 타인을 통해서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타인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투사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타인은 나를 비춰주는 심리적 거울인 셈이다. 타인의 특징이나 문제점이 시야에 포착된다면 투사 현상을 염두에 두고 그 결과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 내 눈에 들어온 타인의 특징이나 문제점은 그 사람의 것이면서 또한 내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그와 관련된 무언가가 존재하기에 인식이 이루어진다. 사물이든 관념이든 감정이든 내 안에 없는 것은 인식이 불가능하다. 타인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올 때는 그에 대한 품평으로만 행위를 그치지 말고 내 안에서 무엇이 자극되었는지도 함께 들여다보아야 한다. 투사 현상을 나 자신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다. 나 역시 본문 속의 인물들에 대해 어느 시점에서 비평 의식을 거두고 그들에게서 느낀 바를 성찰의 근거로 삼아 그 결과를 나 자신에게 대입하는 데 주력했다. 이 연재물의 중심 주제이자 융 심리학이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지목하는 '자기실현'의 핵심 원리는 무의식의 의식화다. 무의식에 숨어 있는 주입된 사고, 인습적 작용, 왜곡된 감정을 바로잡는 것은 물론, '그림자'로 통칭되는 컴플렉스, 억압, 결핍의 문제를 해소하고, 내적 인격인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의 균형적 발달을 도모하는 과정이 바로 자기실현이다. 심리학에서는 '자기실현'을 '개성화'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결국 목적하는 바는 '자기다움'의 성취다. 투사 현상은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귀중한 학습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변화의 동력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내 경우에는 이 시기의 어수선한 주변 상황이 '자기다움'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자극했고, 그 결과로 여행의 흐름이 나 자신을 돌아보고 보완하는 쪽으로 점점 더 분명한 경향성을 보이면서 나아갔다.




      

차영진출간작가


      유럽을 여행하는 정석 따윈 없다저자작가, 사진가, 여행가, 자유기고가, 이따금 행위예술가. 예술과 여행의 눈으로 삶을 독해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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