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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타인과 생활을 섞는다는 것

불안이 유령처럼 떠도는 국제 난민들의 거처에서

KLCC,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




불안은 또 다른 불안을 부른다


숙소의 분위기는 연일 밝았다. 여행자들이 뿜어내는 활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곤 했다. 서로 간의 소통도 활발한 편이었다. 나는 그 무리에 끼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자발적 고독을 선택한 상황이기에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게 먼저였다. 관계가 엮이기 시작하면 남들의 계획에 휘말려 어영부영 시간을 흘려보낼 공산이 컸다. 조용한 생활을 고수하는 가운데 2층 라운지 공간에서 작업에 매진하는 일과를 반복했다. 발리에서 이용한 협업 공간들에 비하자면 허름한 휴게 시설에 불과했지만 작업을 하기에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수상한 기운이 숙소에 감돌기 시작했다. 활기찼던 숙소에 변화가 조금씩 일기 시작했는데 느낌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 시작은 이랬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2층 라운지 공간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숙소 매니저가 인도 사내 하나를 대동해 올라왔다. 인도 사내의 곁에는 각별한 관계로 보이는 인도 여자도 있었다. 세 사람은 내 바로 옆에서 장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는데 작업 중에 들려오는 어렴풋한 목소리들로 보아 계약 사항을 상호 확인하는 듯했다. 고용 관련 항목도 언급하는 것 같았고, 그 밖에도 세부적인 영역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화는 인도 남성이 주도했는데 뭔가 숨 막히는 기운을 풍겼다.  


다음날부터 인도 사내는 매일같이 숙소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숙소 운영과 관련해 자질구레한 부분들까지 관여하는 모습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숙소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는 투숙객에게 상시로 무료 제공하던 인스턴트커피의 이용 시간 제한이었다. 24시간 주방에 놓여 있던 커피가 하루 4시간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스탭들은 커피를 어딘가로 치웠다. 배급 경제의 부활도 아니고,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비교적 큰 규모의 숙소에서, 그것도 나날이 거의 만실을 기록하는 곳에서 돈 몇 푼 아끼려고 커피 제공 시간을 제한하는 모습이 영 이상해 보였다. 


하루는 무슨 사고 같은 게 있었는지 숙소 매니저와 인도 사내가 아랍계 투숙객들을 2층 복도에 따로 모아 놓고 공지 사항을 전달했다. 지나치는 길에 그 모습을 마주쳤는데 대화 분위기가 아주 무겁고 심각했다. 그로부터 1시간 후, 아랍계 여행자 하나가 다른 투숙객들에게 캔맥주를 돌리면서 돌아다녔다. 나에게도 한 캔을 건넸는데 왜 돌리는지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었다. 불미스러운 사태의 후속 조치라는 사실만 감지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 무렵, 스탭으로 일하고 있던 중국 여행자 하나가 일을 그만두고 다른 도시로 떠났다. 난데없이 빠져나가는 모양새로 미루어 내부적인 갈등이 생긴 듯했다. 얼마 전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 인도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답답함을 호소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갈등의 흔적이 묻어 나왔다. 친절하고 성실한 태도로 숙소에 생동감을 불어넣던 친구인지라 라운지 공간에서 여장을 정돈하는 그녀를 향해 여러 명의 투숙객이 다가와 아쉬움을 표했다. 반면 숙소 측은 그녀에게 형식적인 인사 정도만 건넬 뿐이었다. 그녀가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숙소의 분위기가 침체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2층 라운지 공간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인도 사내가 낯선 중국 사내를 대동해 올라왔다. 그러고는 2층의 거실 공간을 도미토리로 바꾸는 계획을 중국 사내에게 설명했다. 중국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마다 인도 사내는 쏘아붙이는 말투로 새로운 계획이 얼마나 타당한지를 따발총처럼 떠들어댔다. 아주 듣기 싫은 목소리였는데 말끝마다 ‘머니’(Money)라는 말이 튀어나와서 더 듣기 싫었다. 처음에 숙소 매니저와 2층 라운지 공간으로 올라왔을 때만 해도 당시 동행한 인도 여성을 숙소에 취업시켜 주러 온 줄 알았는데 요 며칠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인도 남성이 배우자를 대동해 숙소를 인계받는 자리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2층에 라운지 공간이 있어서 그나마 숨통이 트였고, 다른 투숙객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텐데 그걸 또 방을 만들어서 돈을 벌 궁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갑한 마음이 밀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숙소의 분위기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활기는 가라앉았고, 여행자들 간의 소통도 줄어들었다. 서비스는 나빠진 대신 숙박비는 올랐다. 투숙객의 만족을 우선시하던 예의 그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대충 눈속임해가면서 여행자들의 주머니를 최대한 털겠다는 심산만이 공간 구석구석을 불쾌하게 떠돌아다녔다. 그 좋던 인터넷 평점이 하락을 거듭하게 될 미래가 눈에 선했다.  


날마다 악화되는 숙소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숙박지를 옮길까 며칠간 고민했다. 그렇지만 인도 사내의 꼼수를 조금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발동했다. 물질만능주의가 만들어내는 병폐를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 돈만 밝히는 인도 사내는 복도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끔찍했지만 나머지 스탭들과는 잘 지내고 있는 상황이라 개인적으로 불편한 부분은 딱히 없었다. 도저히 못 봐주겠다고 느끼면 그때 숙소를 바꾸기로 했다.  


숙소에는 시리아 출신 여행자들이 일부 있었다. 이집트, 모로코 등 또 다른 아랍계 여행자들도 장기 체류 중인 상황이라 숙소에서는 중동 현지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 자주 펼쳐졌다.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미국발 유행가와 함께 중동의 대중음악도 라운지에서 연일 울려 퍼졌다.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들의 사정도 조금씩 귓가로 흘러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시리아 여행자가 다른 유럽계 여행자에게 자신의 사연을 설명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자신이 시리아 출신임을 밝힌 그는 내전을 피해 도망쳐 나왔다는 사실을 설명한 데 이어 말레이시아에 집을 구해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살고자 하는 계획을 털어놓았다. 모국에서 벌어진 안타까운 사태에 더해 해외에서도 차별의 상황을 적잖게 겪어온 그일 텐데 뜻밖으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는 목소리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 모습이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 장면을 목격하고 나서 보니 비로소 다른 시리아 여행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들 비슷한 입장에 처한 듯 보였다. 나와는 사정이 다른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애잔한 느낌도 들고, 거대 권력에 대한 분노도 생기고 그랬다. 


어느 날엔가는 한 이집트 투숙객에게 이집트 현지의 사회 현실을 물어보기도 했다. 시리아인들이 내전을 피해 나라를 탈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인들 역시 자국의 불안한 사회상에 근거해 나라 밖으로 나서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숙소에 체류 중인 이집트인들 역시 여행을 위해 쿠알라룸푸르에 체류하는 게 아니란다. 직업을 구하고 있거나 그와 준한 활동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들과 나의 일상은 표면적으로 별 차이가 없었다. 오전에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샤워를 한 후 브런치를 챙겨 먹고는 그날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처리하고, 그렇지 않으면 작업을 하는 일상이 그들의 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내가 작업을 하는 동안에 그들은 구직 활동을 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삶의 보금자리인 숙소는 탐욕스러운 인도 사내의 등장으로 폐허로 변해가고, 내 감정은 난민 친구들에게 나 자신을 투사하는 쪽으로 흐르고, 여러 가지로 각성이 필요한 상황. 변화를 촉구하는 북소리가 내 안 어딘가에서 메아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 사람이 만들어 내는 파장

발리에서도 다양한 성향과 처지의 투숙객들이 숙소의 분위기를 흔들었지만 쿠알라룸푸르에 비하자면 한결 평화로운 편이었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목적한 바를 실행하는 데는 별다른 불편이 없었다. 반면 쿠알라룸푸르에서는 불안정한 분위기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아랍권 투숙객들의 불안이 내면으로 자주 스며들었다. 개인적으로 아랍인들에 대해 이렇다 할 편견은 없다.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여행한 이슬람 국가들과 길 위에서 만난 아랍인들 대다수가 좋은 인상을 남겼다. 커다란 호의를 경험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쿠알라룸푸르의 숙소에서 함께 지낸 아랍인들 역시 선량했고, 사정들도 딱했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상태에서 감상에만 빠져 있을 수도 없었다. 사람이 모여 있는 현장에서는 언제나 에너지의 교류가 발생하기에 부정적인 파장을 경계하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는 그들이 불안을 자극해 올 때마다 중심을 바로잡기에 바빴다. 더불어 사는 삶이라지만 기분만으로 만인을 포용할 수는 없다. 여행 기분에 휩쓸려 대책 없이 덤벼들었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처지에 스스로를 투사하면서 삶의 태도가 부정적으로 변화할 수도 있고, 무절제한 흐름에 휩쓸려 중심을 잃을 수도 있다. 세계인들과의 폭넓은 소통을 원하는 여행자라면 다양한 인종이 드나드는 곳을 거처로 선택해도 좋지만 자신에게 집중하고자 하는 여행자라면 분위기가 좀 더 차분한 곳을 체류지로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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