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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장소의 영향력을 극복할 수 있을까

공간의 한계에 도전한다

음악 분수, KLCC,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상상력의 부족이다


여행을 떠나온 지 두 달이 지났다. 발리 생활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는 얘기다. 다음 체류지로 낙점한 곳은 동남아의 허브로 부상하고 있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 원격 작업자들의 성지인 치앙마이와 저울질을 하다가 적잖은 망설임 끝에 선택한 곳이었다. 짱구에서 협업 공간 멤버 몇 명에게 작업 생활을 이어나갈 곳으로 쿠알라룸푸르가 괜찮은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쿠알라룸푸르를 작업 거점으로 삼아 본 이들 대다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 아직은 원격 작업의 인프라가 충분히 조성되지 않았고, 문화 환경도 단조로워 따분한 생활이 이어질 거라는 의견들이었다. 때문에 작업 효율도 낮을 거라고 했다. 긍정적인 전망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고민을 시작했다. 치앙마이로 바로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쿠알라룸푸르에서 한 달을 체류한 후 치앙마이로 넘어갈 것인가. 인터넷을 뒤져 보니 실제로도 쿠알라룸푸르는 원격 작업자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낮았다. 만족스러운 환경을 갖춘 협업 공간이 눈에 잘 띄지 않는 데다가 그나마 눈에 들어온 협업 공간들은 문화적으로 척박해 보이는 구역들에 띄엄띄엄 분산돼 있었다. 예술 씬이 활성화되어 있다면 현지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재미라도 있을 텐데 이렇다 할 예술 씬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굳이 찾아가서 시간을 보내야 할 이유가 없는 도시인 듯했다. 그럼에도 최종 결정은 쿠알라룸푸르에 체류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이유가 있었다. 


총 6개월의 여정 중 한 달을 빼서 아직 가 보지 않은 아시아 국가들을 여행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떠올린 옵션은 두 가지. 첫 번째는 발리 생활을 마무리한 후 한 달간 아시아 국가들을 여행한 다음 치앙마이로 넘어가는 것. 그러자면 아시아 최대 노선의 항공사가 있는 쿠알라룸푸르를 베이스캠프로 삼아야 했다. 발리의 후속 체류지로 쿠알라룸푸르를 물망에 올린 이유였다. 하지만 작업을 위해 오른 여정의 중간 지점에서 여행을 하면 작업의 흐름이 흔들릴 가능성이 컸다. 해서 떠올린 두 번째 옵션은 발리에서 치앙마이로 넘어가 3개월 정도 머무르면서 작업을 모두 마무리한 후 마지막으로 긴장도 풀 겸 그동안의 노고도 치하할 겸 한 달 간 여행을 하는 것.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무렵에는 여권 만료일이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느 나라를 가든 입국을 거부당할 듯했다. 선택지는 결국 하나로 좁혀졌다. 


아시아권의 여행지를 두고도 얼마간 고민을 했다. 작업을 위해 오른 길이기에 체류지에서 너무 먼 곳은 부담스러웠다. 아직까지 여행해 보지 않은 중동 국가들은 거리상으로 무리인 것 같고, 체류지 근교의 국가들은 대부분 여행을 했다. 몇 개 남지 않은 선택지를 두고 고심한 끝에 세 개의 나라를 물망에 올렸다. 브루나이와 스리랑카와 몰디브. 브루나이는 동남아에서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고, 스리랑카와 몰디브는 묶어서 여행하기에 괜찮아 보였다. 


신혼여행 일색의 몰디브를 혼자서 가는 게 옳은지에 대해 의문이 없지는 않았다. 스리랑카와의 항공 연계성은 나쁘지 않았지만 몸과 마음이 붉게 달아오른 허니문 커플들 사이에서 홀로 해변을 배회하는 그림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개인 여행자가 묵을 만한 숙소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여행의 실행 여부를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던 발리에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뜻밖에도 신혼여행을 위한 고가의 리조트 외에 개인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 눈에 띄었다. 구간마다 적당한 가격의 항공권도 남아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감행할까 싶었는데 느낌이 그리 좋지 않았다. 눈에 띄는 문제는 없는데 기분이 영 찜찜했다. 뭔가 중요한 의미가 담긴 신호인 듯해 결국 여행 계획을 접었다. 그러는 사이 쿠알라룸푸르가 좀 더 가까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일단 넘어가서 작업에 매진하기로 했다. 


그러나 쿠알라룸푸르행을 결정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발리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하는 사이, 이번 기회를 이용해 장소에 지배당하는 현상을 최대한 극복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그동안 여행을 해 오면서 반복해서 찾아든 깨달음이 있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낙원을 찾아 무작정 떠돌아다닐 게 아니라 내가 서 있는 곳을 낙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이번이야 말로 그 깨달음이 관념적인 차원을 넘어 실제로도 유효한지 현실 세계에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장기 체류에 적합하지 않다는 쿠알라룸푸르를 실험 장소로 삼아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연습을 하면서 내 능력으로 장소를 주도적으로 활용하는 게 가능한지, 내가 환경의 지배력에 어느 정도까지 대항할 수 있는지, 척박한 문화 환경이 일상과 작업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인지 등을 점검해 보기로 했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내 안의 현상들을 꾸준히 진단한 후 그 결과를 토대로 보완을 시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쿠알라룸푸르를 향해 날고 있는 비행기 안.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던 원격 작업자들의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불길한 메아리를 만들어냈지만 직접 겪어봐야 진위를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거취를 다시 고민하자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얼마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쿠알라룸푸르는 한 나라의 수도답게 그 풍모가 꽤 웅장했다. 토착 문화가 가득한 발리와는 그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다. 새로운 지역에 들어선 까닭인지 심신에 활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역시 공간의 힘이었다. 기분은 산뜻했지만 원격 작업에 어울리지 않는 도시라고 하니 마냥 즐거워할 수 만도 없었다. 공간과의 씨름에서 대패해 크나큰 좌절감에 휩싸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돌연 아찔해졌다.  


온몸으로 훅 끼쳐오는 열대의 더위를 헤치며 찾아간 숙소는 규모가 비교적 컸다. 꽤 시원스러운 느낌. 운영 스탭도 친절한 편이었고, 관리 체계도 잘 갖춰진 인상을 받았다. 북적이는 아랍계 여행자들의 모습에서 체류 지역이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총 여행 기간인 6개월 중 절반은 여행자 숙소에서 묵기로 계획을 세워 둔 상태. 그러자면 한 달 정도는 여행자 숙소를 더 이용해야 하기에 큰 불편이 없으면 숙소를 변경하지 않고 계속 묵기로 했다.  


여장을 풀고 거리로 나섰다. 주변 지형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고, 생필품도 몇 가지 사야 했다. 오래전에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묶어 배낭여행을 했는데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를 포함해 모든 여행지에서 전반적으로 좋은 느낌을 받았다. 기대 이상으로 발전해 있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더랬다. 갖출 건 대부분 갖추고 있으면서도 과도기를 지나는 여느 개발도상국처럼 사회가 폭주하는 느낌을 풍겨 오지 않아 더욱 좋았다. 오히려 현지인들의 순박한 심성이 감동을 자주 불러일으켰다. 뇌리에 남은 인상이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만나는 쿠알라룸푸르의 풍경들이 꽤 반갑게 느껴졌다.  


흐뭇한 걸음이 쿠알라룸푸르 최고의 번화가인 부킷빈탕까지 닿았다. 이왕 나선 김에 추억의 공간들도 찾아다녔다. 많은 변화가 잇따랐는지 분명히 와본 구역인데도 새롭게 느껴지는 장소들이 많았고, 그 와중에 기억까지 가물가물해 여기가 거긴지 헷갈리는 현상이 잇따랐다. 몇 곳만이 익숙하게 느껴졌는데 그마저 어렴풋한 이미지만 겹쳐질 뿐이었다. 어쨌거나 우붓과 짱구에 이어 세 번째 체류지에 발을 디뎠다. 슬슬 워밍업을 시작해야 할 터였다.





# 물리적 한계 vs 정신적 노력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쿠알라룸푸르에서 벌인 장소와의 힘겨루기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절반은 실패했다는 얘기다. 장소와 씨름한 이 시기를 통해 물리적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절실하게 느꼈다. 하지만 장소의 한계 덕분에 뜻밖의 진취성을 내면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한계 조건을 조금이라도 뛰어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했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수시로 고민하는 가운데 하루 루틴의 최적화, 숙소 내에서의 생활 태도 재정립, 산책 루트의 개척, 영감을 제공하는 현지 문화 요소의 발굴, 식사 메뉴의 다변화 등 일상의 활기를 유지할 수 있는 해법들을 지속적으로 찾아 나갔다.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감각을 최대한 동원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또한 감각이 둔화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조치들이기도 했다. 덕분에 활발하게 정신을 가동하며 생활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갖춰진 환경이었다면 이만큼의 노력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의 경험들은 후에 긍정적인 작용을 꽤 많이 불러일으켰다. 그중 최고의 성과는 장소에 대응하는 솜씨가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는 점이다. 6개월 간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에서 장소의 한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때로는 그 한계를 기분 좋게 극복해 내는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공간의 영향으로 인해 흐름이 좋지만은 않았던 여행 현장에서는 후에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스스로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나는 그랬다지만 원격 작업을 위한 도시로 쿠알라룸푸르를 권하고 싶지는 않다. 업무 혹은 작업 성과가 중요하다면 다른 도시를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쾌적한 작업 공간이 딸린 개인 숙소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예산이 넉넉한 경우라면 쿠알라룸푸르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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