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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내 정신 세계의 고찰

스미냑 비치, 스미냑, 발리, 인도네시아




심리의 작동 원리를 알아야 나를 바로 읽을 수 있다


핀란드에서 온 여행자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쾌활하면서도 담백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심리학을 전공하는 학도였다. 나 역시 심리학에 관심이 많은지라 대화는 자연스럽게 정신세계의 문제로 흘렀다. 아직은 배움의 과정에 있다지만 그녀의 소양이 생각보다 깊어 소통의 즐거움이 컸다. 여행 사진으로 그녀의 내면도 가볍게 분석을 했다. 그동안 찍은 여행 사진 중 30점가량을 한국에서 인화해 가져 왔는데 그녀에게 보여주면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게 했다. 신중하게 사진들을 살핀 그녀는 주로 사람이나 동물이 복수로 등장한 사진을 골랐다. 


선택된 사진들을 앞에 두고 개인적 성향과 현재의 상태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자주 해오던 일이라 기본적인 사항은 어렵지 않게 분석할 수 있었다. 관계를 중시하는 것 같다고 얘기했더니 그렇다는 대답. 관계망이 풍요로운 핀란드에서와는 달리 혼자의 몸으로 나날을 버텨야 하는 여행길 위의 상황이 사진 선택에 영향을 미친 듯 보였다. 그녀 역시 이번 여행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제대로 소통한 사례는 드물어 관계의 결핍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이따금 큰 소리로 웃었는데 그 표정이 꽤 시원스러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해맑게 웃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곤 했다. 스스로를 웃음이 많지 않은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인지 타인이 시원스럽게 웃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청량한 음색을 발산하며 폭소를 터뜨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내 사람 취향이 그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이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모습 역시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농담이 오고 가는 기분 좋은 분위기를 이용해 잠시 춤을 추기도 했다. 그 춤사위에서 유행에 간섭 받지 않은 자신만의 그루브가 흘렀는데 그 역시 내 취향이었다. 돌아보면 유행을 뛰어넘는 개성의 소유자들에게 자주 시선이 갔다.


내친김에 발리에서 머무는 동안 사람 취향과 관련해 또 다른 사례를 경험한 적은 없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한 장면이 떠올랐다. 우붓에서의 일이었다. 숙소 근처에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 식당이 있다기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라면볶음 비슷한 요리를 시켰는데 가격도 저렴하면서 맛도 괜찮았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각인된 부분은 음식이 아니라 주인아저씨의 인자하고 친절한 모습이었다. 영업용 친절이 아니어서 바라보는 마음이 편안했다. 아저씨의 얼굴에서 보살 같은 미소가 피어날 때마다 마음이 나른해졌다. 그러고 보면 삶의 긴장이 적게 느껴지는 사람을 좋아했다. 반면 야망을 앞세우는 사람에게서는 상당한 피로감을 느꼈다. 만인에게 칭송받는 사람이라고 해도 언제나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같이 있으면 늘 피곤했다.


발리 생활의 시작과 함께 나 자신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다운 삶을 살려면 나 자신의 특성부터 먼저 파악해야 했다. 타성이 최소화된 공간에 있으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해 보기에 적기였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넘겼을 사소한 부분도 유심히 되짚으며 스스로에게 집중했다. 사물과 현상에 나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수시로 확인하는 사이, 그 전까지는 몰랐던 내 정신적 특징들이 하나둘씩 정체를 드러냈다. 어떤 것은 취향이나 선호의 형태로 드러났고, 다른 어떤 것은 작동 방식의 형태로 드러났다. 


물론 하루 종일 내면 분석에만 골몰하지는 않았다. 일상생활에 집중하다가 문득 새로이 발견한 내 안의 특징이 있으면 그걸 곱씹은 후 그 내용을 간추려 두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주 5일제 여행의 휴일에 인근을 탐방하면서 나에게 어울리는 여행의 형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이었는데 몇 차례에 걸쳐 내 안에서 이는 반응을 살펴본 결과 한 곳에서 오래 머무는 여행보다는 목적지를 바꿔가며 이동하는 여행이 나에게 좀 더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업에만 초점을 맞춰 생활하는 것보다 현지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두루 하면서 지내는 게 스스로에게 유익하다는 자각도 더불어 찾아왔다. 그 내용을 자동기술법 글쓰기에 적어 넣었다.


또 다른 각성도 있었다. 나는 자연 속에 있으면 심신이 크게 활성화되는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 낯선 여행지에서 뒷골목을 탐방하는 것도 취향에 잘 맞았다. 또한 당위를 중시하는 성향이라는 점도 확인했다.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자신감 있게 행위로 옮길 수 있었다.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목적한 바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기에는 아직까지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환경의 영향력을 극복하지 못하는 일개 중생에 불과하다는 각성이 뼈저렸지만 그게 나라니 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인식들은 발리의 환경을 어떻게 하면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해 주었다. 어느 날 아침, 가만히 숙소 내부를 둘러보고 있는데 독특한 모양의 오브제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늘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그동안은 인지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눈에 띈 김에 뭐가 어떤 식으로 배치되어 있나 쭉 살폈다. 거의 대부분이 힌두 문화를 담은 아이템들이었다. 종교적 상징들이 숙소 곳곳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던 게다. 심지어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도 조형물이 채워져 있었다. 사방을 쭉 둘러보며 발리인들의 공간 꾸미는 감각에 혀를 내둘렀다. 


숙소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침의 자각이 있고서 협업 공간으로 향하는 길에 보니 지역 곳곳에도 다양한 상징물들이 배치돼 있었다. 가는 곳 어디에서든 무수한 기호와 상징들이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발리인들의 영적인 품성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환경. 그런데 상징은 인간의 정신 활동이 빚어낸 가장 중요한 산물이 아니던가. 내면세계가 활발히 자극되는 환경에 에워싸여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기분이 묘했다. 시간과 돈을 들여 이 좋은 환경 속으로 들어왔음에도 그동안에는 정신세계를 자극하는 수많은 상징들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 섬 전체가 영적인 상징들로 가득한 만큼 내 안에서도 다양한 작용들이 일고 있을 터였다. 이제부터는 도처의 상징들이 내 안에서 어떤 자극을 만들어내는지도 살피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나 자신을 꾸준히 탐구해 왔으나 이번 여행에서 만큼은 아니었다. 영적인 기운이 충만한 발리에서 스스로를 응시하다 보니 순간의 양상과 그 저변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더욱 분명하게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내 정신 구조의 특성을 파악하면서 순간순간의 감정도 함께 읽어 나가는 사이 가면을 쓴 감정들도 하나둘씩 실체를 드러냈다. 자부심으로 보였던 감정이 나중에 보니 열등감인 경우도 있었고, 단호함으로 보인 감정이 도피 심리의 다른 얼굴임을 깨달은 적도 있었다. 그 밖에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감정들이 많았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내가 내 속에 있었다.




# 거대한 진실이 숨어 있는 심리의 세계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인 무의식의 발견을 과학의 3대 발견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두 가지는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다. 충분히 공감할 만 하다. 무의식이 발견되기 전까지 인류는 자각이 가능한 것들만을 진실로 여겼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하면서 상황은 180도 뒤집어졌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세계는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뉘며, 그중 의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영역에서 아주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인류가 감지하고 포착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논란거리였을 프로이트의 주장은 이제 심리학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상식으로 통한다. 우리는 의식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것들만을 자각할 수 있다. 그래 봐야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전체 현상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그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무의식에서 벌어진다. 중요한 작용의 대부분은 무의식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식할 수 없다고 해서 무의식이지만 관심을 기울이면 무의식에서 벌어진 현상들을 의식 세계로 불러낼 수 있다. 자기 탐구도 이러한 과정 하에서 해야 한다. 인간 심리를 탐구하다 보면 세간에 떠도는 통념 속에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실상을 반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예컨대 강인한 모습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여행자에게는 선망의 시선이 쏟아지게 마련인데 실제로 그는 여린 심성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높다. 내면의 컴플렉스를 보상하기 위해 겉을 화려하게 치장했을 뿐이다. 이밖에도 무수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인간 심리의 탐구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요한다. 그렇지만 고된 과정을 감내하고도 남을 만큼 그 효용이 크다. 





      

차영진출간작가


      유럽을 여행하는 정석 따윈 없다저자작가, 사진가, 여행가, 자유기고가, 이따금 행위예술가. 예술과 여행의 눈으로 삶을 독해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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