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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자동기술법, 나를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의식

나를 온전히 만나는 고요하고 투명한 시간

힌두 풍속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 짱구, 발리, 인도네시아




나를 온전히 만나려면 있는 그대로 꺼내서 펼칠 것


날마다 일기를 썼다. 일반적인 일기의 형식과는 다소 다른 자동기술법을 이용한 글쓰기. 자동기술법은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글로 옮기는 글쓰기 기법으로, 내 안에서 튀어나오는 생각이나 감정을 최대한 거르지 않고 쭉쭉 써내려 가는 방법을 취한다. 문학의 영역에서는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을 앞세운 글쓰기 방식이나 시인 이상의 글이 자동기술법의 대표적인 예다. 미술 영역에서도 자동기술법의 원리를 적용해 손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자동기술법 글쓰기는 이번 여행 전에도 몇 차례 시도한 적이 있었다. 전업 작가로 활동한 기간이 10년을 훌쩍 넘어선 시점이었으나 내 글을 쓴 지는 꽤 오래전이었다. 그 무렵까지 몇 년 간 쓴 글은 나를 담는 것보다는 문장 기술의 구사가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었다. 내가 다루는 주요 영역인 문화, 예술, 여행에 관련된 글이긴 했으나 내 철학이나 감성을 담는 쪽은 아니어서 기계적으로 작업을 했다. 그 도중에 내 글 쓰기와 관련해 개인적인 좌절까지 겹치면서 글 감각이 상당히 무뎌졌다. 감각을 복구해야 했다.


언젠가는 다시 회복할 수 있겠지 생각했지만 가만히 있어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었다. 굳어 있던 감각을 풀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내면의 근력부터 회복하는 게 먼저겠다 싶어서 생각한 방법이 자동기술법 글쓰기였다. 의식의 흐름대로 쭉쭉 써 내려가다 보면 정신과 감정이 조금씩 유연해지리라는 예상이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반대로 몇 차례의 시도 후 중단하기를 반복했다. 쓰고 나면 개운했으나 다시 쓰려니 귀찮았다. 지속적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찾아오면서 쓰다가 말기를 반복했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몇 달 전에 있었던 제주 여행에서도 자동기술법 글쓰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과거와 마찬가지로 사나흘로 끝이었다. 발리행을 결정한 후, 이번에는 제대로 해 보자고 마음을 먹고 제주에서 며칠간 글쓰기를 한 파일을 그대로 이용해 제주 편의 뒤를 이어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리로 떠나오기 정확히 한 달 전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자동기술법 글쓰기를 발리에 도착해서도  계속 해 나갔다. 귀찮을 때가 많았지만 매일 같이 했더니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과가 되었다.


글쓰기의 방향은 나 자신을 탐구하는 쪽으로 맞췄다. 하루의 일과도 요약해서 적어 넣었으나 그 역시 내면의 변화를 읽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대신 앞선 여행들에서도 그랬듯 여행 수첩을 따로 적어 자동기술법 글쓰기가 일과의 나열로만 흐르는 현상을 방지하고자 했다. 여행 수첩에 일자와 날씨와 숙박지 등의 일간 기본 사항, 일과의 흐름, 각 일정을 시작하고 마무리한 시각, 지출 내역, 사색의 키워드 등을 기재함으로써 자동기술법 글쓰기에서는 의식을 흐름을 기술하는 데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본업이 글이라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에 상당히 민감한 편이다. 꼼꼼하기는 얼마나 또 꼼꼼한지 마음먹고 달려들면 교정교열 전문가의 작업본에서 오탈자를 잡아낼 정도였다. 그럼에도 실수가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글에 생긴 오류를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렸다. 잡문을 쓰더라도 다 쓰고 나서 다시 한번 보면서 교정을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기록 당시 눈에 보이는 실수만 교정하고 그냥 넘어갔다. 다시 읽어 보면서 교정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문장의 구조가 조악하거나 문법이 엉망진창으로 흘러간다 싶어도 더 이상 손대지 않고 계속 글을 적어 내려갔다. 지상 최고의 자학적 습관이라는 완벽주의를 최대한 분쇄할 필요가 있었다.


감각의 복구와 나 자신의 탐구가 목적이긴 했으나 막연한 마음으로 시작한 상태이다 보니 처음에는 기술하는 내용이 가벼웠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내용이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다. 내면의 더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기 위해 집중하는 현상도 벌어졌다.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감지할라 치면 그 내용을 거름 없이 기술했다. 내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최대한 적어 넣고자 했다. 창피하거나 민망한 일도 가차 없이 기록했다. 행위를 미화하려는 감정이 내면에서 느껴지면 그것도 꾸역꾸역 적었다. 


그러는 사이 자동기술법 글쓰기는 내가 몰랐던 나를 읽어내고,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작업으로 변해갔다. 편안한 상태에서 마음의 뒤를 밟다 보니 글쓰기의 흐름이 어느새 한밤의 동네 산책처럼 가벼워졌다. 흐름은 부드러워진 반면 내 안에서 벌어지는 작용들은 좀 더 깊고 섬세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꺼내고,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일련의 과정은 정화를 위한 의식에 가까웠다. 


우붓에 이어 짱구에서도 매일같이 자동기술법 글쓰기를 했다. 아침에 잠을 깬 직후 밀려든 감정들, 일상의 표면 아래에서 느껴지는 흐름, 새로이 마주친 사람들, 그들과의 관계에서 벌어진 일들, 그로 인해 발생한 내면의 현상,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난 후의 기분, 그날 발견한 디지털 노마드 문화의 특징과 그 배후의 현상, 인근 해변에서 서퍼들이 파도를 가르는 장면의 묘사에 이르기까지 머릿속에서 혹은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게 있으면 그대로 다 적었다. 어떤 날은 바빠서 몇 줄 적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날은 거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글을 쓰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다. 정신이 한결 맑아진 느낌을 받곤 했다. 평온감 속에서 발생하는 고요한 활기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진작부터 할 걸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물론 그러한 내용도 어김없이 기록했다. 자동기술법 글쓰기는 내면의 정화와 더불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내고 그에 맞춰 나를 조절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형태의 글쓰기 방식이 심리 치료를 위한 도구로 유용하게 활용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얼마나 큰 효력을 발휘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에 대한 깨달음이 찾아온 시점은 그로부터 여러 달 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해서 접한 어떤 책이 이 글쓰기 방식을 꽤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실천을 권하고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큰 호응을 얻은 그 책은 이러한 방식의 글쓰기가 창조성 강화, 더 나아가 자기실현을 이끌어 주는 대단히 중요한 도구라고 설명했다. 기록 방법마저도 내가 취한 방식과 유사했다. 


어쨌거나 날마다 글을 썼다. 글을 쓰면서 나를 응시했다. 날마다 내 안에 자리 잡은 문제점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혹독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제점을 발견할수록 나 자신을 더 관대하게 대하려고 했다. 평생을 우열논리와 무한경쟁에 시달린 인생이었다. 문제를 발견하면 수정할 시간과 기회를 충분히 줬고, 잘 되지 않으면 채찍질 대신 다시 격려했다. 이제까지의 삶을 통틀어 나 자신과 가장 밀착한 나날들. 내 안의 진짜 내가 그 윤곽을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 자동기술법의 용도와 활용

자동기술법은 초현실주의의 주창자인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고 문학으로도 뻗어나갔다. 차용하는 형식이 어떻든 진짜 나를 꺼내 놓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현재도 이 기법은 예술 영역에서 유효하게 활용된다. 글쓰기 강좌나 미술 교육에서 의식의 통제 없이 자신의 인식이나 감정을 꺼낼 목적으로 이 기법을 활용한다. 전문가의 힘을 빌리는 것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다. 무념무상의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게 관건이다. 의식의 통제력은 우리가 자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면 상투성이나 통념이 개입하는 순간을 좀 더 쉽게 감별해 낼 수 있다. 나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목적이므로 윤리 의식이나 미학적 선입견이 발동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다. 선악이나 미추의 문제에 신경 쓰지 말고 흘러나오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얘기다. 아무런 간섭이 없는 곳에서 시도해야 하고 결과물도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지 않도록 단단히 신경 써야 한다.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는 순간 진실의 입은 작동을 중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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