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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고독 여정의 본격적인 시작

고독이라 쓰고 담금질이라 읽는다

에코 비치, 짱구, 발리, 인도네시아




고독은 재탄생의 필수 조건이다


여행의 방향이 급변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사람을 목적지로 삼았던 내가 스스로 고독을 선택한 것이다. 관계망이 차단된 해외라는 환경이 고독으로 뛰어드는 나를 도왔다. 한국이라면 반드시 따라붙었을 외부의 압력을 발리에서는 겪지 않아도 됐다. 새 인연을 향한 불필요한 기대와 강박을 다스리고, 외로움을 타인을 빌려 해소하려는 태도를 조절하면 그뿐. 이따금 깊은 외로움이 밀려오는 장기 여행에서 스스로를 고독 속으로 밀어 넣고 그 흐름을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고독으로의 돌입은 이미 어느 정도 진행이 된 상태였다.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작업이었기에 과거의 여행들에 비해 이례적으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발리로 떠나온 이후 인터넷에서도 인기척을 내지 않았는데 그 역시 전초 현상의 하나였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스스로에게 집중하기로 계획을 세운 터라 출국 사실도 아주 극소수에게만 알렸다. 이유를 설명하면서 될 수 있으면 내 소식을 주변으로 전파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도 해 두었다. 치열한 각오로 여행에 임하고 있는 내 마음은 모른 채 자신의 여행 욕구나 로망을 일방적으로 나에게 투사하는 이들을 계속해서 겪어왔다.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감정의 높이를 상대에게 맞춰 호응해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피로감이 밀려왔다. 때문에 이번에는 내 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극소수의 지인들에게만 출국 소식을 알려 두고는 여행의 시작과 함께 한국과의 직접적인 교신을 끊었다. 


이후 한 달 가까이 인터넷에서 잠잠이 지내다가 우붓에서 촬영한 ‘I am a forest’ 프로젝트의 작업 결과를 공개하면서 내 근황과 좌표를 한국에 알리게 되었다. 작업의 특성상 어쩔 수가 없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내 상황을 노출하고 말았다. 목표한 방향대로 나아가려면 단호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작업 결과의 공개를 마지막으로 인터넷에서 일체의 게시를 다시금 중단했다. 내가 속했던 사회에서 내 존재는 상당히 빠르게 지워지는 듯 보였다. 고통과 희열이 교차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안토니와 현지 디자이너 A가 등장해 관계의 문제를 고민케 하고는 사라졌다. 그다음 수순은 고독으로의 돌입이었다.


가장 먼저 실행한 일은 숙소에서의 교류를 축소하는 것이었다. 여행자 숙소에서 머물고 있는 상황이라 사람을 피할 길은 없었지만 대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조용히 지내고자 했다. 어울려 살아가는 게 인생이니 만큼 무작정 인연을 거부하려 들지는 않았다. 사람에 대한 예의는 지키는 게 좋겠다 싶어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는 마찬가지로 반갑게 화답했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딱 그 정도만 했다.


협업 공간에서도 조용히 지냈다. 어느 저녁, 디지털 노마드 문화와 관련해 몇몇 서양 친구들과 우발적으로 토론을 벌이면서 다 같이 관계를 트게 되었고, 그 상황을 계기로 무리가 만들어졌으나 그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내 할 바에 집중하며 지냈다. 다들 반짝거리는 면이 있었지만 협업 공간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그날의 작업에 집중하길 반복했다. 이따금 긴요한 정보를 나누는 정도의 교류만 했을 뿐이다.


협업 공간은 이벤트를 자주 열었다. 행사가 공지된 후에는 어김없이 운영 매니저가 다가와 참석을 권했는데 디지털 노마드 문화에 대한 환상이 꽤 사그라든 상태라 참석 의지가 발동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책무를 완수하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운영 매니저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싶지도 않아 운영 매니저가 새로운 이벤트 소식을 알려올 때마다 농담으로 받아넘기며 상황을 요령껏 빠져나갔다. 그러나 운영 매니저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몇 차례 불참 의사를 통보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새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다가와 참석을 권유하길 반복했다. 하지만 나 자신부터 보호할 일이었다. 운영 매니저의 능글맞은 권유를 농담으로 받아내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어느 시점부터는 내가 농담으로 응수하면 그가 웃음을 지으며 되돌아갔다. 알겠다는 표시였다. 


고독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필요성은 한국에서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예술 축제를 마친 직후였다. 내 안팎에서 ‘고독’이라는 낱말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밀려드는 자극도 '고독'이요, 내 안에서 일렁이는 갈망도 '고독'이었다. ‘독존자’(獨尊者)라는 낱말도 불쑥불쑥 인식 위로 떠올랐다. 어법에 맞는지 알지도 못한 채 ‘독존자’라는 낱말을 가끔 뇌까렸다.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도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상태에 이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솟구쳤다. 완벽한 실현은 불가능하겠지만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근사치에 다가가 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러한 방향성 정도는 품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이후에도 ‘고독’은 다양한 상징을 앞세워 여러 방향에서 나를 향해 쇄도했다. 흔들리는 삶의 진폭을 줄이려면 내 발로 고독의 세계에 진입해 스스로를 담금질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느낌만 살랑거릴 뿐 실행을 자극하는 이렇다 할 사건도, 고독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분명한 명분도 닥쳐오지 않아 조용한 곳에 처박혀 작업이나 하자며 발리에 왔다. 그런데 어느새 고독이 코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사람들 틈에서 지내고 싶은 욕망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게 다 타인을 숙주로 삼아 기생하려는 마음이 빚어낸 욕구였다. 내가 있는 곳은 외부의 방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해외. 외딴 여행지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빈 공간을 허랑하게 떠도는 시간이니 고독 속으로 뛰어들기에 이만큼 훌륭한 환경이 없는 듯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삶이 제자리걸음을 반복할 가능성도 농후했다. 외부의 작용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면, 또한 인생살이에 대한 입장을 정돈하고 소신 있게 살아가려면 스스로를 단단히 재구축해야 할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앞에서 고독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렸다.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은 기분.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고 그 내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처절하게 실패하더라도 한 번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심정. 반드시 지금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지금이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내 발로 고독 속으로 뛰어드는 기분은 생각보다 통쾌했다. 잘해 보고 싶다는 마음도 질끈 일었다. 그때까지는 좋았다. 역대급의 좌절과 고통이 잔뜩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 외로움 vs 고독

사전적인 의미의 차이가 거의 없어서인지 '외로움'과 '고독'은 구분 없이 사용될 때가 많다. 하지만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두 낱말의 의미 차이는 상당히 크다. '외로움'은 홀로 되어 쓸쓸한 느낌을 말한다. 외부에 의해 고립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이브에 아무에게도 연락을 받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이 '외로움'이다. 반면 '고독'은 홀로 떨어져 있는 상태다. 자기 자신과의 직면, 생의 본질에 대한 성찰, 존재적 고뇌를 경험하는 시간이 고독이다. 위대한 성취의 전제 조건으로 자주 기능하는 이유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고독을 '타인의 지배 아래에 놓인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세계'라고 표현했고,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독을 '누려야 할 기회'로 바라보았다. 신화의 세계에서도 영웅은 고독의 시간을 반드시 거친다. 성장의 필수 관문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간섭 없이 자신과 직면해 내부에 쌓여 있는 문제를 발견하고, 해법을 찾고, 자기를 단련하는 시간이 고독이다. 재탄생을 위한 담금질의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영어는 두 낱말의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가름한다. 외로움은 ‘Loneliness’, 고독은 ‘Solidarity’다. 문장에 적용해 보면 낱말의 용도가 상당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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