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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장소의 변화는 활력을 유도한다

예술 마을 우붓에서 새로운 핫스팟 짱구로

베라와 비치, 짱구, 발리, 인도네시아




새로운 환경은 다양한 자극을 선사한다


우붓 생활의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낯선 풍경들 속에서 첫 아침을 맞이한 게 엊그제 같은데 그새 한 달이 지나갔다.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은 야속했지만 뒤돌아보면 꽤 만족스럽게 보낸 한 달이었다. 물론 모든 게 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계획했던 일들을 꾸준히 실행하려 노력했고, 생활 습관을 바로잡는 데도 집중했기에 비교적 건강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진 작업도 열심히 했고, 여행 휴일을 이용해 지역의 볼거리도 적잖게 구경했으며, 디지털 노마드 문화도 꽤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지역이 선사하는 풍요로운 환경도 흡족한 기분을 자주 선사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발리 최고의 예술 마을 우붓에서는 읍내 어디에서든 지역의 문화와 역사가 묻어나는 회화와 공예 작품을 손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그동안 자주 접해왔던 서양 미술과는 그 기풍이 많이 달라서 그만큼 자극도 컸다. 어둠이 자욱이 내려앉은 밤에는 지역 곳곳의 라이브 클럽들에서 일제히 음악의 향연이 펼쳐졌다. 하드락, 얼터너티브, 레게 등 서양 대중음악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해 내는 현지 밴드의 실력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고, 타악기와 관악기와 현악기를 조합해 제3세계의 음악을 연주하는 다국적 밴드 역시 영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무대를 선보였다. 지역을 에워싼 풍부한 자연환경도 맑은 기운을 자주 수혈해 주었다. 상업주의가 속도를 높이고 있는 우붓이었지만 예술과 자연이 뿜어내는 창조적인 에너지가 지역을 더 크게 압도하고 있었다.


우붓 생활의 만족감을 높인 또 하나의 원천은 순박하고 친절한 현지인들이었다. 관광객의 범람으로 몸살을 앓는 발리라지만 선량한 이들도 지천이었다. 번화한 지역을 벗어날수록 현지인들의 표정은 점점 더 순박해졌다. 눈길만 마주쳐도 감동이 찾아드는 순간을 꽤 많이 경험했다. 다정하고 친절한 현지인들의 표정에서 신의 얼굴이 자주 들고났다. 지역 전체에 상업화의 흔적이 자욱한 것과는 별개로 현지인들은 '영성'으로 대변되는 토착 문화를 꿋꿋이 사수해 내고 있는 듯 보였다.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낸 우붓에 이어 다음 체류지로 정한 곳은 짱구. 최근 지역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발리 내에서 새로운 핫스팟으로 부상하고 있는 곳으로, 중심가 안팎에 속속 들어차고 있는 맛집들과 바투 볼롱 비치, 에코 비치, 베라와 비치 등의 서핑 포인트를 앞세워 여행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변화의 속도는 가파르다지만 관광객이 대거 몰리는 쿠타나 스미냑에 비해서는 한산한 분위기여서 평화로운 일상을 꾸릴 수 있을 듯했다.


나를 짱구까지 실어줄 픽업 차량의 운전기사는 활달한 성격이 돋보이는 브라질 혈통의 발리 토박이였다. 짱구로 향하는 동안 유쾌한 목소리로 자주 말을 건네 왔는데 외국인들을 많이 실어 날라서 인지 영어 실력도 괜찮았고, 대화를 이끌어 가는 솜씨도 능숙했다. 위트 넘치는 그의 언변에 쉴 새 없이 맞장구를 치는 사이 시간이 술술 흘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발리에는 지역민들이 다 같이 공유하는 슬로건이 있었다. ‘우리는 커다란 가족’. 외국인들이 자주 드나들고 체류하는 곳인 만큼 지역주의에 몰입하지 말고, 현지인과 외국인 모두를 하나의 커다란 가족으로 여기자라는 의미란다. 발리인들이 널리 공감하는 표현이냐는 내 질문에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지역의 심층에 깔린 정신문화를 느낄 수 있는 슬로건이었는데 우붓에서의 내 경험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붓에는 외국인이 정말 많았다. 읍내를 오가는 인구의 절반은 외국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정도 상황이면 토착 문화가 진작에 붕괴했어야 하는데 외래문화가 어지럽게 이식된 상황 속에서 토착 문화 역시 그 기세를 단단히 유지하고 있었다. 점점 더 어수선해지는 분위기와 더불어 사회 문제도 증가 추세에 있는 우붓이었지만 관광산업의 본격적인 시동과 동시에 세속화가 극심해진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비하자면 지역 문화의 보존 상태는 꽤 양호한 편이었다. 원시의 지혜를 내재한 토착 문명이 작동한 결과인 듯했는데 '우리는 커다란 가족'이라는 슬로건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읽혔다. 배타적인 태도로 외국인에게 대결 심리를 야기하기보다는 커다란 가족의 일원으로 존중함으로써 자신들의 문화적 흐름에 동참시키는 발리인들의 해법이 참신하게 다가왔다.  


두 남자의 시끄러운 수다를 싣고 한 시간 여를 달린 차량이 낯선 건물 앞에서 바퀴를 멈췄다. 미리 예약해 둔 짱구의 숙소였다. 운전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숙소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한 환경이 나를 맞이했다. 청소에 신경을 많이 쓰는지 실내 전체가 상당히 깨끗했고, 무엇보다 거실의 채광 상태가 상당히 좋았다. 밝고 건강한 공간이구나 싶었달까. 쾌적한 시설에 더해 여행자들이 뿜어내는 활기도 인상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공용 부엌도 마련돼 있었는데 어지간한 조리 도구는 다 갖추고 있는 듯해 식당 음식에 지친 입맛을 요리로 해소할 수 있을 듯했다. 한 이틀 머물면서 장기 체류에 적합한 인근 숙소를 찾아볼 요량이었는데 여기서 장기 체류를 해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한 가지만 빼고는 모두 마음에 드는 숙소였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숙소 주인에게서 툭툭 튀어나오는 신경증. 20년 전 서핑을 하러 발리에 왔다가 정착했다는 호주인 주인장은 사소한 질문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그와 대면할 때마다 피로감을 피할 수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현지인 스탭들은 너나할 것 없이 친절했다. 숙소의 다른 조건들이 꽤 만족스러운 데다가 내부 상황에 익숙해지고 나면 주인장과 부딪힐 일도 별로 없을 듯해 첫 숙소를 장기 체류지로 낙점했다. 


잠자리를 완비했으니 이제 생활에 필요한 추가 옵션을 보강할 차례였다.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이느라 피로감이 몸에 쌓였지만 새로운 공간이 주는 활기도 만만치 않은 터라 양 미간에 힘을 주며 거리로 나섰다. 짱구에서 발이 되어 줄 스쿠터 렌탈과 하루의 대부분을 보낼 협업 공간 등록부터 해치울 계획. 마침 숙소 바로 근처에 스쿠터를 렌탈해 주는 곳이 있다고 했는데 가서 보니 동네 편의점에서 스쿠터 렌탈까지 하고 있었다. 편의점 직원을 어르고 달래며 가격 흥정을 한 결과 연식이 오래된 스쿠터를 빌리는 조건으로 여행자 렌탈가의 최저선까지 깎는 데 성공했다. 몰아보니 브레이크가 잘 들지 않았지만 사용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라기에 조심해서 타고 다니기로 마음을 다지며 렌탈비를 지불했다. 


기동력을 업그레이드했으니 이제 협업 공간으로 가서 멤버십을 등록할 차례였다. 분위기가 활기차기로 소문난 협업 공간이 있다기에 기대감을 키우며 스쿠터의 가속 핸들을 당겼다. 서핑의 요지 중 하나인 에코 비치가 근처에 자리하고 있어 여가 활동과 일을 병행하려는 이들이 몰려든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협업 공간 앞에 도착해 스쿠터를 한쪽에 세워두고 해변부터 먼저 탐방했다. 협업 공간에서 해변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3분 정도. 이따금 머리를 식히러 오기에 훌륭한 환경인 듯했다. 파도의 결을 따라 넘실거리는 바다 풍경도 아득하니 보기 좋았다. 


협업 공간은 듣던 대로 분위기가 상당히 활기찼다. 에어컨 룸의 수용 인원이 적어 더위를 참아가며 작업을 할 일이 걱정되었으나 공간을 가득 채운 디지털 노마드 대부분은 그러한 사실을 괘념치 않는 듯 보였다. 개방형 라운지 공간에서 더위를 참아가며 일에 열중하는 수많은 디지털 노마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이열치열의 정신으로 한 달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하여 한 달 간의 분투를 다짐하며 그 자리에서 멤버십을 등록했다. 이번 역시 한 달 무제한 멤버십. 이로써 짱구 생활에 필요한 핵심 환경을 모두 완비했다. 한 달 동안 잘사는 일만 남았다.




# 새로운 장소가 가져다주는 활기

우붓에서의 생활은 꽤 만족스러운 편이었지만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일상이 느슨해지는 현상도 발생했다. 이러다가 생활이 처지지 않을까 우려하던 차에 체류지를 짱구로 옮기게 되었는데 새로운 환경이 선사하는 신선한 느낌 때문인지 다시금 의욕이 차 오르면서 생활 태도가 바지런해졌다. 이후에도 체류 지역을 옮길 때마다 같은 현상을 반복했다. 체류 기간이 길어질수록 영향력이 감소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환경의 힘을 느끼게 해 준 경험들이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새로운 환경은 다양한 자극을 선사하게 마련이고, 자극은 작용을 촉진하니까 말이다. 일상이 공회전할 때 장소에 변화를 줌으로써 활기를 되찾게 되는 것은 여행의 가장 대표적인 효용이기도 하다. 여행을 설계할 때 이 같은 작용까지 고려해 여행의 목표를 설정한다면 외연의 확장에 더해 내적 성장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위치를 변화시키지 못할 때는 아쉬운 대로 체류하고 있는 장소의 구조나 분위기를 변화시키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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