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영진 Nov 17. 2019

나쁜 습관과 씨름하는 나날들

오래된 게으름을 잡아라

뜨갈랄랑, 발리, 인도네시아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본질을 들여다볼 것 


'성실 강박'에 짓눌린 삶을 오래도록 살았다. '성실'마저 주입식으로 체득한 탓이었다. 성찰을 생략한 채 성실성을 몸에 익히다 보니 그것이 발휘되는 양상은 늘 맹목적이었다. 겉으로는 꽤 씩씩하고 바지런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강박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런 줄 몰랐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고서 비로소 깨달았다. 내 성실성이 기계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가만 보니 그 목적지도 잘못돼 있었다. 내가 발휘한 성실의 수혜자는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었다. 스스로를 방치한 채 타의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쪽으로 성실성을 발휘하고 있었던 게다. 가만 보니 행동 또한 권리보다 의무를 먼저 신경 쓰는 쪽으로 발달한 상태였다. ‘성실’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일기 시작했다. 맥락이 실종된 한낱 구호로서의 ‘성실’ 앞에서 반감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성실성이 가져다준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인 데다가 변덕을 부리는 일도 드물다 보니 주변과의 관계는 대체로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다. 오랜 시간 몸에 밴 성실성에 다른 장점들이 더해지면서 직업인으로서의 입지가 급속도로 넓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외부의 요구에 부응하는 쪽으로 학습된 성실성이었다. 남에게는 높은 책임감을 발휘하면서 나 자신은 책임감 있게 돌보지 않았다. 후폭풍은 불가피했다. 


부작용은 개인 생활에서 불거져 나왔다. 밖에서는 약속도 잘 지키고, 심지어는 책임지기로 한 것 이상의 일들까지 해결하면서 정작 일상은 게을렀다. 성실 과잉의 반작용이었다. 긴장감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시공간인 일상으로 돌아오면 늘어지기에 바빴다. 기계적인 성실성에 대한 반감까지 일면서 게으름이 제 몸을 더욱 부풀리기에 이르렀다.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고 반항심만 작동시킨 탓이었다. 밖에서는 성실하고, 안에서는 게으름으로 일관하는 이중적 삶이 계속 이어졌다.  


오래된 게으름은 여행에서도 문제를 만들어 냈다. 패기 있고 활기찬 태도로 여행에 임하다가도 긴박한 지점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늑장을 부렸다.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반발심이나 도피 심리를 작동시킨 것이었다. 그 결과로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만들어 냈다. 장기 여행의 시작점에서 출국 비행기를 놓치는가 하면 적정가의 항공권을 발견하고도 세월아 네월아 하다가 거액의 추가 요금을 지출했다. 공항 안내방송이 애타게 이름을 부르짖는 존재가 된 적도 몇 차례 있었다. 한 번은 공항 직원과 손을 맞잡고 공항 복도를 질주하기도 했다. 숙소가 동나고 있는 상황에서 괜한 배짱을 부리다가 길거리에서 고통스러운 밤도 보냈다. 그밖에도 불필요한 실수를 종종 범했다. 


태도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이따금 찾아들었지만 마음뿐이었다. 그러다가 '자립'이 인생의 중요한 화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후 몇 가지 개인적 화두가 더해지면서 자립적인 삶의 실마리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여행지는 발트해 연안국에서 발칸 반도로 이어지는 극동유럽(앞선 연재물인 '나는 숲이다'의 무대)이었다. 카우치서핑을 하면서 일상의 실천가들에게 솔선수범의 미덕을 배웠고, 숲 파괴 문제를 다룬 'I am a forest'라는 사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주체성과 능동성의 문제를 고민했다. 귀국 후에는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장시간을 들여 '자립'을 주제로 한 예술 축제를 준비하고 개최했는데 'I am a forest' 프로젝트와 맞닿는 행사인지라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주인의식을 발휘해야 했다. 몸을 부지런히 놀려야 하는 상황이 1년 이상 계속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체질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그러한 흐름이 이번 여행으로도 이어졌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여행의 준비 과정에서 벌어졌다. 그동안은 예외 없이 여행 전날 밤에 여장을 부랴부랴 꾸렸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직업상 여행을 빈번하게 해 온 나에게 여장 꾸리기는 꽤 익숙한 행위다. 숱하게 반복해 온 일이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여장을 꾸릴 수 있다. 상시로 대기 중인 세면백이나 전자용품 액세서리백은 항목만 간단히 확인해 배낭에 바로 집어넣으면 된다. 카메라 가방도 세부 물품의 이상 유무만 간단히 점검하고 바로 메고 떠나면 된다. 여행용품을 많이 챙기는 편이 아니어서 그 밖의 물품들도 빠른 시간 내에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뒤돌아 보니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만 중시한 방식이었다. 매 과정을 하나하나 충실하게 밟아야 여행의 태세가 제대로 갖춰지는데 그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해서 이번에는 여행길에 오르기 2~3주 전부터 세세한 사항들까지 꼼꼼히 챙기며 준비 작업을 했다. 예전 같았으면 현지에 가서 해결하면 된다고 여겼을 일이나 대충 하고 지나쳤을 부분들에서도 그 의미와 필요를 되새기며 최대한 완벽한 준비 상태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마음을 먹고 달려들어 보니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준비 상태가 견고해질수록 산뜻하고 안정적인 기분이 찾아들었다. 더러는 내면세계가 촘촘히 재조직되는 느낌도 받았다. 종전의 여행 준비 방식이 얼마나 엉성했는지를 깨닫게 하는 순간이 적지 않았다. 물적 토대가 내면세계와 긴밀하게 연동된다는 사실은 나중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여행의 시작점인 우붓에 도착해서도 노력을 계속 이어나갔다. 사소한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일례로 샤워를 한 후에는 바닥에 분산된 머리카락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전의 여행들에서는 하지 않다가 극동유럽을 여행하면서 카우치서핑 호스트의 생활공간을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시작한 행동이었는데 이번에는 나 자신을 위해서 했다. 무언가를 하고 나면 그 뒷정리도 꼼꼼하게 했다. 생활환경의 정돈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역시 예전 같았으면 뒤로 미뤘거나 대충 해치우고 말았을 일들이었다. 그 밖의 상황들에서도 게으름을 바로잡기 위해 집중했다. 


그렇지만 오래된 게으름의 관성도 만만치 않았다. 며칠에 한 번씩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여행에서는 사고 방지 차원에서라도 부지런을 떨 수밖에 없었는데 한 곳에서 장기 체류를 하다 보니 서둘러야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귀찮은 마음이 들면 내일로 미루면 그만이었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빈 틈 속에서 게으름은 약한 고리를 속속 치고 들어왔다. 걸핏하면 기승을 부리는 게으름과 밀고 밀리는 접전을 자주 펼쳐야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이겼고, 어떤 날은 게으름이 이겼다.  


갈등은 수영장 앞에서 자주 폭증했다. 멤버십을 등록한 협업 공간 중 하나는 협약 관계에 있는 인근 리조트의 수영장을 무료 체육 시설로 제공했다. 멤버십 등록을 부추긴 요인이었다. 수영을 좋아하지만 몸이 찌뿌둥하거나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날에는 수영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휴양 여행에서의 물놀이가 아니라 신체 단련을 위한 수영이다 보니 준비에서부터 실행에 이르는 과정이 통째로 귀찮게 느껴졌다. 협업 공간으로 나갈 준비를 하면서 수영용품을 추가로 챙기고, 협업 공간에서 몇 분을 걸어 수영장으로 이동하고, 수영장에 도착해서는 탈의 공간에서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지상보다 답답한 물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 쉬며 팔과 다리를 젓고, 수영을 마친 후에는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어쩌고 저쩌고 할 것을 생각하면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수영 도구를 챙길라 치면 면벽 수행이라도 하러 가는 사람처럼 기분이 아득해졌다. 


그래도 꾸역꾸역 수영을 했다. 일주일 정도면 습관이 들어 자연스럽게 수영장으로 향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두 번에 한 번 꼴로 게으름과 싸웠다. 그래도 꾸역꾸역 했다. 수영 이외의 국면들에서도 계속해서 게으름과 씨름했다. 박빙의 상황이 자주 펼쳐졌다. 승리감에 웃었고, 패배감에 고개를 숙였다. 지난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 내면의 자극과 그에 따른 변화

최종 결과를 이야기하자면 여행 중에는 게으름과 계속 씨름만 하다가 여행의 종료와 더불어 나도 모르게 부지런을 떠는 현상이 벌어졌다. 여행의 과정 과정에서 생활 습관을 어느 정도 교정하기는 했지만 확실한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반면 귀국 후에 발생한 변화는 체질 개선을 실감할 정도로 그 양상이 분명했다. 스스로 의지를 발휘해 행동한다기보다는 저절로 행위가 이루어지는 쪽에 가까웠다. 지속적으로 내면세계에 자극이 가해진 상태에서 일상 복귀를 상징하는 시점인 '귀국'과 함께 변화가 본격화된 게다. 타의의 실현을 위해 행동했던 과거와 달리 생활 곳곳에서 나 자신을 돌보고 가다듬는 쪽으로 부지런을 떨었는데 삶이 크게 고양되는 느낌을 받았다. 과거에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여행 전보다 건강한 모습을 보이곤 했지만 이번에는 변화의 차원 자체가 달랐다. 내면세계의 응시를 바탕으로 행위의 의미와 방향을 꾸준히 곱씹으며 노력을 지속한 덕분인데 귀국 후에도 상태 변화를 꾀할 일이 있을 때마다 같은 방법을 활용하곤 한다. 결과는 매번 긍정적이다. 



이전 04화 주 5일제 여행의 시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