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젠가 May 08. 2024

수술 받기 전과 수술 후의 나는 달라질 것이다.

모교에 가다

고통의 순간과 기억들을 기록하고 타인과 공유하는 건, 특히 나처럼 미 완성된 배우자로 인해 겪는 고통이나 상실감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건 단순히 한탄이나 한풀이가 아니다.  이는 이런 순간들을 견뎌내고 나는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다짐이다. 그리고 결국 나는  내 인생을 온전히 잘 살아간다는 자각이자 위로이고 칭찬이다. 또한 생의 어느 시점 이 모든 것들이 다 해결되고 사라지고 열반과 평화를 찾았을 때 이 시점을 돌아보고 나 스스로에 대한 감사를 할 수 있을 만한 증거이다.


가장 괴롭고 힘들고 추운 시점,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운 시점에서 나는 내 인생 지난 시절, 가장 아름다웠고 좋았고 치열했던 이십 대 초반의 기록과 기억이 묻어있는 곳을 방문하여 과거의 나에게 위로를 받았다. 그래 , 내가 한때는 이곳의 일부였고 치열하게 열심히 살던 사람이었구나. 

과거의 나, 그렇게 물렁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자각은 결혼 후 20여 년간 계속되는 남편의 실패와 시부모의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나란 존재에 대해 의기소침해지고 약해지고 마침내 병들어 그곳을 찾은 나를 일깨워줬다. 내 모교이자 전 직장이었던 곳. 모교 의료원에서 수술을 받고, 학교와 그 주변들을 거닐며 그 장소에 남아있던 20년 전의 내 모습을 기억하고 그때의 내가 얼마나 빛나는 존재였는지를 기억해 내는 시간들을 통해 나는 치유받았다.

그리고 결혼해서 남편만을 믿고 이 모든 것들, 반짝이던 20대의 나, 좋은 직장, 든든한 친정식구들과 친구들을 뒤로하고 남편의 고향으로 따라와 시부모의 손아귀에서만 살아갔던 시간들이 얼마나 고통이었는지도 자각했다. 이 수술을 마치고 나면 이제는 정말로, 그동안은 감정적 으로만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법적으로도 벗어나려고 다짐하게 되었다. 이런 결심은 과거의 반짝이던 내가,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끌려가듯 살아온 현재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된다. 


진단을 받은 시점은 3월 초, 전공의들 파업으로 서울의 빅 5 병원들의 마비 소식이 뉴스에 속속 등장하던 때였다. 나는 전직 간호사이고 결혼 전 내가 졸업한 모교의 의료원인 서울의 빅 5 병원 중 한 곳에서 근무했었다. 나는 그곳의 시스템을 믿고 있고 그곳의 의료진들을 믿고 있다. 나 역시 그 일부였다. 그래서 사실 내 모교이자 전 직장에서 수술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지만 그때 까지는 전 직장에서 수술을 받을 현실적인 엄두를 못 냈다. 일단 그 병원의 사정이 어려워서 있는 수술도 취소되는 상황이란 것, 부산에 아직 어린아이들을 두고 서울로 수술 전 검사들을 다니고 수술을 받으러 다닐 형편이 안된다는 것, 수술 직전까지 내가 일을 해야 내 애들 입에 밥이 들어갈 상황인 데다 내 아이들이 엄마가 부재중일 때 아이를 돌볼 자원인 아빠가 현재 그 돌봄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여력이 안된다는 사실(남편이 나를 그렇게 괴롭혀서 새롭게 무리해서 시작한 가게는 4개월이 지난 시점인 지금 또 막대한 부채만 남아 있다. 이 부채를 해결해 달라고 또 수술을 겨우 마치고 살아 돌아온 나를 현재도 괴롭히고 있다.)이 나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서울의 큰 병원, 그곳이 비록 내 전 직장이고 모교라도 그리고 그곳이 나에게 가장 편안함을 주는 공간이라도 그곳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그냥 부산에서 적당히 수술을 받으려 했다.


부산에서 암 의심 소견을 받고 가장 먼저 한 것은 세침검사이다. 세침검사란 갑상선에 암 의심 부분에 아주 작은 주삿바늘을 넣어 조직을 흡인해 내고 그 조직이 악성인지 양성인지 병리 검사를 하는 것이다. 나는 건강검진을 하다가 갑상선에 결절이 있으니 정밀 검사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그 병원과 연계된 부산의 한 1차 병원에서 세침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악성이었고 그곳에서는 바로 수술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 병원 의사는 수술 방법과 이후 관리등 내 인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았고 현재의 내 상태에 대한 설명도 충분히 하지 않았다. 그냥 암이니 무조건 바로 수술을 예약하라고 했다. 그때 진단을 내린 그 1차 병원 원장에게서 암이란 진단을 받아 올바르고 차분한 판단을 할 수 없는 환자에게 바로 수술을 하라고 밀어붙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갑상선 암을 비롯한 모든 암은 조직검사를 바탕으로 진단을 받는다. 세침 검사 이후 도말한 조직의 현재 단계를 나누는 기준도 grade1~6까지로 나눠져 있고 보통은 5단계 이후로 갑상선을 절제하는 수술을 권유받는다. 나는 4단계였다. 4단계는 사실 수술을 하기도 애매하고 수술을 안하기도 애매한 상태이다. 


나는 애매한게 가장 싫다. 악성이다, 하지만 수술을 하기 애매한 상태다. 그래도 수술을 해서 갑상선을 떼버리자는 의사의 말에 그렇다면 차라리 다른 곳에서 한번 더 검사를 해서 결과를 받아보고 싶었다. 


부산에서 진단받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갈등할 때 우연히 모교에 남아서 근무하고 있는 친구와 통화를 했다. 그 친구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말한 건 아니다. 그때까지 아직 수술에 대한 계획을 못 잡고 그냥 수술을 해야 한다면 가장 빨리 할 수 있고 거리가 가까운 곳에서 수술하자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 친구를 비롯한 몇몇 대학 동기들과 나는 여행계를 하고 있었는데 수술받는 상황을 염두해서 동기모임 여행계까지 챙길 상황이 안될 것 같아서 미리 두 달 치 곗돈을 입금했다. 그런데 총무였던 그 친구가 전화를 해서 무슨 일이길래 두 달 치 돈을 한 번에 내냐고 물었다. 어쩔 수 없어서 사실 내가 갑상선 암 진단을 받고 수술계획을 짜고 있어서 그렇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친구는 당장 휴가부터 내고 서울로 올라와라, 너 부산 어느 병원에서 진단받았는지 몰라도 나는 신뢰할 수 없다, 우리 병원에서 수술받아라, 지금 이 병원에서 가장 수술을 잘하는 수술 집도 교수님은 모모 교수인데 내가 가장 빠른 외래를 잡아주겠다 하며 나를 다그쳤다. 그리고 새로운 소견과 정확한 진단을 위한 조직검사 일정, 수술 일정 등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켜 주며 모교로 올라가서 수술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친구가 추천한 모모 교수는 현재 의료원에서 가장 수술을 많이 하고 있고 수술과정에서 오류가 없으며 수술 후 회복률과 수술 이후 환자의 삶의 질을 고려한 치유계획을 가장 완벽하게 짠다 했다. 그런데 이름을 듣고 보니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 선배였었다. 친구는 모모 교수님과 내가 동아리 선후배라는 인연이 있다는 걸 알자마자 모모 교수님을 찾아가 20여 년 전 대학 시절 나를 기억하냐고 당신 동아리 후배가 지금 암 진단을 받았다며 당신이 수술해 줘야 한다고 압박했다. 친구는 나를 위해 그 유명한 학연과 지연과 온갖 카르텔?을 끌어와 교수에게 청탁했고 그 선배 교수는 빡빡한 외래 진료일정을 빼낼 수 없으니 점심시간 에라도 봐주겠다며 자신의 점심시간을 빼서 내 외래일정을 잡아줬다. (졸업 후 나는 그 선배와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는데 사실 개인적인 인연은 학생 때 끝났는데 ,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다. 일찍 결혼해서 멀리 남편 따라 이사 가서 연고가 없는 남편의 고향에서 자리 잡으며 살면서 단 한 번도 학연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가장 위기에 처한 순간 이 카르텔? 이 작동하다니?) 

조직검사를 다시해 보니 나는 부산에서와 달리 grade 5였고 전이 소견은 없어서 로봇이나 내시경 수술의 적응이 가능한 상태였다. 외부로 보이게 되는 흉터 없이 수술을 할 수 있다는 선택지가 생기게 된 것이다.


사실 이번에 수술을 받으면서 나에게 현실적 지원 (비급여 수술을 할 수 있는 로봇 수술자금과 비급여 요양병원에서 비싼 비급여 치료들을 받을 수 있는 자금)과 감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건 친정엄마였다. 위기마다 나를 구해주신 분,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존재. 엄마.

그런데 우리 엄마는 6년 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내가 나의 아픔을 표현하는 건 싫어하신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6년 전에 남편이 우리가 사는 집을 말아먹은 걸 수습해 주시며 이혼하지 말고 ,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라, 어디 다니며 니 팔자 꼬인 거 말하지 말고 그냥 남들이 보기엔 부잣집 시집간 여자처럼 살라는 당부를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내 모교 병원서 근무하는, 성실하게 임상에서 경력을 쌓아서 한 유닛을 책임지는 선임간호사가 된 친구의 도움으로 수술을 빨리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엄마는 크게 화를 내며 네가 암인 거 이제 네 친구들이 다 알겠다고 싫어했다. 또 그 팔자론과 함께. 

내가 암에 걸린 것, 내 남편이 바보 같고 약한 사람인 것, 내 시부모가 거짓으로 사람을 현혹시켜 평생 돈을 빌미로 가스라이팅을 하며 아들 며느리를 쥐고 흔들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래서 나를 쥐고 흔들고 젊은 시절 나를 지배하려 들던 시부모가 지금은 내 어깨의 짐이 되고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은 내 잘못은 아닌데 엄마는 그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 여겼다. 하지만  내가 사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것을 싫어했다. 직면하고 인정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나의 엄마는 딸이 다음단계로 넘어가 인생의 괴로움을 수습하며 치열하게 사는 것보다 그냥 가스라이팅을 당한 상태로 그 속에서 인정 안 하고 귀 막더라도 편안하고 안온한 상태로 남에게 비치길 바란다. 

 나를 사랑하고 늘 나를 도와주고 기도해 주지만 남의 시선과 이목도 너무나 신경 쓰이는 사람.  내가 상처투성이인 나를 드러내고 남의 이목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가게 될까 봐 두려운 사람. 그냥 남들에게는 엄마의 딸이 그대로의 그 사람이 아닌 시집 잘 간, 아쉬울 것 없이 누리는 사람으로 비치길 바라는 사람. 그래서 이혼이라는 어려운 선택을 하여 엉킨 실타래를 푸느라 어렵게 살아가는 것보다  엉망진창인 남편과 시부모를 받아들이고 그냥 참고 사는 쉬운 선택을 하길 바라는 사람. 

엄마는 딸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모른다 아니, 사실은 딸이 강해지길 바라지 않는다. 엄마의 기준에서 기혼자는 그냥 안온하고 평범하고 곱게 살아가는 게 가장 큰 복이라 여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복이 없다는 걸 나 스스로가 받아들였다. 기혼자 이지만 남편이나 시부모의 덕으로 안온하게 살아갈 복은 없다. 내 애들은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 애들에게만 에너지를 쏟기도 버거워 내 어깨에 의지하는 남편과 시모가 더 나를 짖누르기 전에 결단을 내리고 싶어하는 나를 만류한다. 

이런 엄마에게 교육받고 자라온 나는  겉으로 보기엔 별일 없는 사람처럼 살기 위해 속으로 애쓰고 속으로 참고 견디며 남들의 기준에 들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아왔다. 그래서 어찌 되었든 남편의 잘못들을 조용히 수습하고 참아내며 시모의 행패들을 참아내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치라는 아주 큰 자산을 일궈냈다. 하지만 동시에 남들에게 기혼자의 안락한 가정이라는 범주에서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늘 나를 갈아 넣고 내가 참고 표현 못하고 이겨내는 삶을 사느라 너무나 외롭고 힘들었다.  


결국 그렇게 사느라 나는 병을 얻었다. 그런데 이십 대의 내가 쌓아온 노력과 인연이 닿아, 사십 대의 병든 나를 치유해 준 그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난 이후의 나는 분명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이전 03화 나의 갑상선 암 치료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