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인구를 분산시켜야 하는 게 주 임무인 경기도 신도시들의 탄생에 따라 김포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목가적인 조용한 내 우주는 그때부터 확장되며 균열이 생겨났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눈앞에 탁 트인 논이 펼쳐진다.
한강의 지류였을 강이 흘러 농수확보가 용이하며 서해 바다로 흐르다 쌓인 비옥한 퇴적 평야로 논농사에 적합한 그 고장. 오랜 기간 그 고장은 농업의 중심지로 농부들이 터를 이루고 살았다. 임금님께 올리던 진상미를 수확하는 쌀의 생산지. 내 고향.
가장 먼저 그 변화에 발맞추어 새로운 시도를 했던 건 엄마였다.
삼 남매를 키우며 정말 아끼고 절약하고 부지런히 열심히 살던 엄마와 아빠의 노력 덕에 우리 골목에서 유일한 삼층집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식들은 공부 잘하고 착하게 커갔다. 그런데 아빠는 엄마의 수고를 당연히 여기셨다. 아니 모르겠다.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표현하지 않는 마음은 알 수 없으니까.
아빠는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다정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아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말도 없고 표현도 없으시다. 그러나 그때까지 엄마는 남자들이 뭐 여자말을 들어주나 다들 그렇지 하고 불만 없이 열심히 살아오셨다. 인생의 단 한 순간도 쉼없이 움직이던 우리 엄마. 위대하고 고마운 내 엄마. 불쌍하고 이상한 내 엄마.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주변에 신도시 개발에 따른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다.
엄마 아빠와 같이 어울리던 평범한 농부였던 지인들 중에 토지를 팔아 막대한 현금을 가지게 된 분들이 생겨나셨다. 엄마가 시집올 무렵부터 아셨던 지인들 중에 김포를 떠나 잠실 선수촌 아파트로 이사 가신 분들이 생겼다. 새댁 때 겨울이면 같이 솜틀집으로 솜을 틀러 다니던 지인이 도시가스보일러가 들어오는 아파트에 들어가 오리털 이불을 덮고 모피를 걸치며 길고 추운 겨울을 편안하게 지내며 살 수 있단 걸 알게 되자 우리 골목의 유일한 삼층집,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겨울엔 기름을 사서 날라야 하는 집, 웃풍이 들고 발이 시린 그 집은 더 이상 자랑이 아니었다. 엄마의 눈앞엔 논이 펼쳐지던 조용한 그 세상이 확장되었다.
사실 엄마가 아빠의 땅을 팔아 진주를 얻고자 한건 아니었다. 언니나 나는 추위에 약해서 겨울엔 발에 동창에 걸리곤 했다. 눈이 오면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해야 하는 우린 더욱더 고통스러워했다. 아빠의 땅이 자식들을 위한 조금 더 따뜻하고 편안한 주거 환경이 되고, 아직 젊고 무엇이든 배우고 싶어 하던 엄마에겐 새로운 배움과 도약의 기회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셨다. 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돼서 논이었던 우리 동네 어귀가 상가택지 분양지로 바뀌어 근린생활시설을 지을 수 있도록 용도변경이 되는 걸 알자 엄마는 아빠의 절대 농지를 팔아 그곳을 분양받고 싶어 했다. 꼬마빌딩의 원조였던 근생건물을 올린다면 일찌감치 건물주의 반열에 올라 힘들게 노동하지 않고 임대수익으로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게 엄마의 계산 이었다.
하지만 변화를 싫어하고 새로운 것은 죄악이라 여길 만큼 고집스러운 아빠를 이기지 못해 아빠의 땅이 신축 근생 시설로 탈바꿈하지는 못했다.
내 친정집 주변은 상전벽해라 할 만큼 빠르게 변했는데 내가 결혼하며 그곳을 떠나오고 오랜 시간이 지난동안에도 변하지 않고 그곳을 지킨 건 우리 집뿐이 없었다. 결혼 이후에도 친정을 가면 늘 주변은 공사 중이고 늘 새로운 것이 생겨나서 그곳에서 삶을 꾸려가야 하는 엄마는 온통 먼지와 소음에 고통스러워했다. 김포가 빠르게 변하도록 사십 년을 그곳을 지켜온 내가 나고 자란 그 집은 균열이 생기고 낡고 스러져가다 그 구역 일대에 주상복합을 지으려 하는 건설사에게 팔리게 되었다. 아빠는 끝까지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하셨다. 주변 이웃들이 모두 떠나고 공실이라고 적힌 빈 집들이 늘어났으며 이웃이 살던 집들이 철거되는 소음과 비산먼지에 시달리고 주변이 점점 슬럼화가 돼버리고 나서야 아빠는 매매를 결심했다. 업자가 마지막으로 제시한 가격을 듣고 아빠가 오케이 하자 엄마는 아빠 마음이 변할까봐 얼른 부동산으로 뛰어가서 계약서를 써달라고했다. 엄마는 자식을 모두 독립시키고 그 자식들이 낳은 손주가 독립할 나이가 되자 드디어 추운집에서 벗어나 따뜻한 아파트로 이사 갈 수 있었다.
우리 집이 우리 골목에서는 제일 높은 집이었고 땅에서 나는 쌀을 먹으며 살아가며 별다른 어려움이 없기에 우리가 부유하지는 않아도 가난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대학에 가면서 쌀먹고 자란 내가 스테이크를 먹어 본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자 나도 스테이크를 썰고 싶단 욕망이 생겨났다. 김포가 전부라는 내 믿음에도 균열이 생겼다. 강남을 접하고 강남으로 출퇴근을 시작하며 결국 김포라는 나의 아비투스는 깨져버렸다.
내 조용한 유년기에 제일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되던 엄마.
나는 엄마의 사랑을 갈구했기에 엄마가 자신의 좌절된 심리를 가장 격의 없다고 여기던 나에게 투영하기 시작했을때 그저 받아들였다. 아빠는 김포에 시집와 연년생 삼 남매를 키우며 끝없이 일하고 부지런히 움직여 일궈 삼층집을 지어낸 인생의 동반자이자 파트너인 엄마에게 충분한 상여금을 지급하지 않으셨다. 엄마뿐 아니라 자식인 우리도 땅을 판 다른 아저씨들이 부인과 자식에게 제공했던 아름다운 물건들, 안락한 주거환경, 비싼 사교육 같은 건 제공받지 못했다.
말이 없고 퉁명스러운 아빠에게는 따뜻한 말이나 공감도 기대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빠가 외출 자체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엄마는 새로운 곳을 좋아했지만
여행을 많이 다니지도 못했다. 아빠 식성이 까다로우셔서 식사를 챙기는것도 힘드셨을 것이다.
엄마는 부인의 노력을 당연시 여기는 무관심한 아빠에게서 받는 상처를 딸에게 위로받길 원했다. 아빠가 엄마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그때의 나는 그런 엄마가 슬프고도 힘들었다.
엄마는 아빠의 인정을 늘 갈구했던것 같다.
나 역시 공교육을 받고 평범하게 자라나서 명문대 취업 잘되는 전공을 선택했고 졸업 후 남들이 다 알아주는 곳에 취업하였을 때에도, 또 모두가 부러워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이직했을 때도 그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엄마 아빠만 몰라준다 내심 서운할 만큼 그런것들을 당연히 여기는 부모님에게 늘 인정을 갈구했다.
지금의 나는 그 누구의 인정을 갈구할 필요 없이 내가 나를 인정하고 받아 들는 것의 중요성을 아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충만하고 평화롭다. 그런데 지금의 이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나를 둘러싼 것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지난 날들과 화해할 때까지 사실 너무 많이 힘들었다.
아등바등 애써 좋은 회사에 들어가 보니 그냥 성실히 묵묵히 살아온 김포의 부모님이 배경인 내가 초라해질 만큼 대단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살아남기 위해 그동안 이만큼이나 애써온 것보다 더 많이 애를 써야한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 대단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그저 내 발로 뛰는 놈이였다. 나는 부모 배경이란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놈들에게 압도되어 가며 하루에 네 시간, 김포에서 강남까지 출퇴근을 했고 점점점 쪼그라 들었다.
회사에선 퇴근후 어학원을 다니거나 골프를 배우면 자기 개발 지원금을 줬다. 나는 퇴근 하고 집에가기 벅찼다.
거대하고 번쩍이는 강남에서 어둡고 조용한 김포로 겨우 퇴근해 쉬려는 나에게 자신의 좌절된 불만을 토로하는 엄마. 자식에게 별다른 지원이나 관심 없이 그냥 밥 먹여 키워줬으니 되었다 하는 말없는 아빠에게서 진정으로 독립하는 길은 결혼뿐이라 여길 무렵 나는 남편을 만났다.
그런데 남편과의 결혼이 구원이라 여기며 결혼을 통해 그곳을 벗어나려던 나는 사실은 나 자신말고는 그 무엇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닳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을 벗어나서 더 나은 곳으로 가고 싶어 끊임 없이 헤메이던 김포에서의 나, 유년기 사춘기 청년기 시절의 나를 돌아보고 나서야 내가 가진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 힘의 원천은 아이러니 하게도 김포 였다.
김포 부모님의 낡고 고집 스럽고 변화 없는 삶의 방식이 내가 받은 가장 큰 유산이자 자산이되서 나역시 인생의 어려운 순간 그저 낡고 고집스럽고 묵묵히 어려움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