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바라는 집에 둘째 딸로 태어난 것부터 할머니의 미움을 샀다. 할머니는 점집을 다니며 아들 낳는 이름을 받아와 내 이름을 지었고 다행히 곧 내 남동생이 태어났다.
남동생이 태어나서 할머니를 포함, 모두가 행복하고 기뻐했던 거 같다
동생은 사경이 있었는데 우리 부모님은 매일 하루에 몇 번씩을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직접 물리치료를 해서 고쳐냈다. 아침저녁으로 아기를 눕혀놓고 이리저리 근육을 늘리고 만져주는 노력. 저녁마다 아기를 씻기고 푹신한 보료에서 살살살 어르고 달래며 아기의 목과 어깨를 늘리고 주무를 때 엄마 아빠는 집중하느라 숨을 참았다. 그 순간엔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의사가 첫 메스를 그을 때처럼 모든 에너지가 몰리는 듯 긴장과 고요가 맴돌았다. 그걸 바라보는 나도 숨을 참고 손에 땀을 쥐었다
흉쇄유돌근이 짧아서 생기는 이 증상은 신생아 시기에 발견이 돼서 수술 혹은 꾸준한 재활치료를 해서 개선시켜야 하는데 원인이 명확하고 치료의 방향이 명확하고 무엇보다 진단 인구도 많기에 지금이라면 소아과가 있는 웬만한 병원에서 다 다루고 있는 증상이다. 물리치료도 실비 처리가 된다.
하지만 그 당시에 교통수단은 아빠의 오토바이가 전부였던 우리 집에서 읍내의 작은 소아과라도 가려면 삼십 분을 이동해야 했다. 병원 접근성이 어려운데 딸려 있는 유년기 애가 셋, 가게를 운영하며 연로하신 시어머님까지 챙겨야 하는 엄마가 사경 물리치료를 위해 가까운 병원을 매일 다니기는 힘들고 그대로 근육이 수축이 되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건 더 큰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이리저리 알아보고 사정해서 병원에 가서 스트레칭법을 직접 배워왔고 그 어떤 물리치료사보다 훌륭하게 동생의 짧아진 흉쇄유돌근을 돌려놨다.
그때의 엄마보다 나이가 들도록 세상을 살아보니 그때의 젊은 새댁이었던 엄마의 등을 토닥이고 싶어 진다. 큰딸은 유치원에 보내고 내 손은 잡고 걸릴 수 있게 되자 동생을 업고 나는 걸려서 가게문을 열었던 엄마.
엄마가 아무리 애를 써도 엄마의 몸은 하나였다.
엄마가 나에게 썼던 전략은 너는 누나니까 너는 동생이니까 너는 착하니까 너는 똑똑하니까였다. 나는 나도 애지만 더 어린 동생을 먼저 앉아주는 엄마를 이해해야 했다. 연년생인 언니와 유치원 기간이 겹친 일 년간, 한복을 입는 행사 때마다 한벌뿐인 한복은 언니가 입었다.
나에겐 황토색 코듀로이 멜빵바지를 입히며 엄마는 어린 나에게 나는 한복보다 그 바지가 잘 어울린다고 내가 한복 입은 언니보다 훨씬 예쁘다고 했다. 나는 그때부터 욕망하는 것을 참으며 커갔다.
한참 크는 애들에게 한복을 두 개 사주는 게 사치라고 여기는 실용적인 엄마에겐 더 순한 아이에게 참는 법을 가르치는 게 더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나는 한복이 좋았다. 유치원때는 특별한 행사에 애들에게 한복을 입으라했다. 언니가 유치원 졸업하고 물려받았다.
언니가 입다 작아진 옷을 물려받았지만 나는 사실 새것을 원했다. 하지만 착하고 손 안 가고 알아서 잘하는 똑똑한 둘째 딸. 있는 듯 없는 듯 그래서 키우는 데 힘하나 안 드는 둘째 딸답게 살아야 했기에 나도 새것을 소유해보고 싶다는 주장을 할 수는 없었다.
바지런한 엄마와 땡보 아빠의 노력으로 삼남매가 크며 점점 생활이 윤택해지고 삼남매 모두는 한복을 입을 수 있었다.
애썼어. 살아내느라 애썼어. 지금의 나보다 어린 새댁이었을 그때의 엄마.
하지만 그때의 어린 나는 엄마에게 더 많이 애썼다는 거 엄마는 알아? 그 시기에 단 한 번만이라도, 나도 새것이 가지고 싶다고 소리치고 그런 내가 엄마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단 확신이 있었다면,
나는 애쓰지 않아도 나 자체만으로도 사랑받는 존재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내가 언니동생엄마아빠 같은 타인은 고려대상에 넣지 않은 채 나만을 위한 주장을 내고 내 맘 데로 선택해 볼 수 있는 경험을 했다면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까?
엄마! 엄마는 아들의 사경을 기어이 직접 교정해 줄수 있을만한 힘과 능력과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였자나?그런데 왜 그시절 둘째딸인 나에게는 그런 힘을 하나도 안써줬어?엄마의 에너지는 한정되있고 세자식을 키우며 일을하며 고집스럽고 가부장적인 아빠를 참고 살아내야 했던걸 전부 알고있지만 그래도 난 그때 참 외로웠어.
나는 소리치고 주장할 수 없는 사람으로 커나갔다.
나는 정말 그렇게 알아서 잘하는 딸. 그 누구에게도 그 어느 순간에도 내 의지나 내 욕구보다는 나에게 의미 있는 타인을 만족시키는 선택이 더 좋은 일이라 여기며 커나갔다.
부모에게 기대지말고 요구하지말고 알아서 잘살려고 노력했지만 마침내 어느 순간 어라? 내 인생이 꼬인 거 같다고 느껴졌다. 그 순간 엄마는내 착한 딸이 왜 이런 불행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울었다.
이제야 나는 안다. 그건 불행이 아니라 내가 꼭 겪어야 하는 성장과정이었다.
의미 있는 남을 위한 선택을 하는 게 자신을 위한 주장을 하는 것보다 가치 있다고 배운 내가, 착한 딸이라는 족쇄를 풀어내기 위한 과정. 그리고 마침내 그걸 극복할 수 있었던 건 그 과정에서 엄마를 다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참고 착한 딸이 되어야만 엄마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내가 엄마의 자식이기에 당연히 받을 수 있었던 사랑을 그때도 지금도 받고 있다는 것. 엄마가 나를 위해 울어주고 기도해 주고 그렇게 실용적으로 살며 지켜낸 돈을 빌려주어 그 수렁에서 나올 수 있게 나를 일으켜 줬을 때야 나는 족쇄에서 풀려났다.
평생을 갈구했던 엄마의 사랑과 인정.
엄마에게 짐이 되지 않아야만 사랑 받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인생의 최고 고비에서 쓰러졌을때 사랑받는다 느꼈다.
나에게 반짝이는 것을 약속하며 나를 홀렸던 남편이 판 수렁에 빠진 적이 있다. 내 한복 한번 못 가져 본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던나는 연애할 때 백화점에 가면 세일상품 말고 세일 안 들어가는 신상을 고르라고 하고 고심해서 하나 고르면 두 번째로 고려했던 물건까지 이왕 사는 거 이것도 해라 하면서 하나 더 사주던 통 큰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홀려버렸다.
결혼이란건그렇게 결심하는 게 아닌데 나는 내 성장기 때의 갈망은 그저 반짝이는 것들을 가져보면 채워질 수 있고 남편은 그걸 채워줄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보다 나에게 어떻게 해주냐가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서 했던 선택은 불행히도 불행했다.
그런데 돌아보니 다행히도 그나마 불행을 깨닫고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 그저 남을 만족시키기 위한 선택보다 나를 위한 선택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행복하단 깨달음을 얻었다. 아직도 사실 잘 모른다. 나를 우선시 하는 선택이란게 과연 무엇인지.
자식을 낳고 엄마가 되서 나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생기면 그들을 위해 사는게 나를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김포 엄마가 자식을 위해 살아온 것처럼.
하지만 내가 내 행복만을 위한 선택을 하더라도 엄마는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란걸 드디어 알았다.
너무 늦지 않게 알아서 다행이다.
그저 최선을 다해 너무 바쁘게 너무 노력하며 살아온 엄마.
그런 엄마의 인정을 받으려면 늘 바쁘고 힘든 엄마를 힘들게 더 하면 안 된다 하며 나에게도 사랑을 좀 주라고 요구하지 않고 그저 숨죽이는 선택들을 했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