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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중앙화와 일본의 탈중앙화

일정수준의 탈중앙화는 체제의 혁신을 허용한다

by 시는죽었다 Mar 22. 2025
일본 근대화의 상징인 메이지유신 (1868)일본 근대화의 상징인 메이지유신 (1868)


왜 아시아에서 일본만 유럽 열강과 경쟁할 수 있었는가

아시아에서는 한가지 신화가 있다. 일본만이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열강과 경쟁하는 수준에 올라갔던 것이다. 일본의 청일전쟁(1895) 뿐만 아니알 러일전쟁(1904)의 승리는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일본은 세계 1차대전 승전국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당시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나 보호국 신세를 면치 못한다. 유럽이 한때 두려워 하던 동아시아의 패권국인 중국은 영국과의 두차례의 아편전쟁을 겪고 아시아의 병자로 전락한다. 이 글의 주요 논의 대상이며 남북한의 전신인 조선은 신미양요(1871)에서 미군 1200명을 상대로 조선군 1000명이 싸워 미군 집계 조선군 전사자 243명 익사자 100명 그리고 미국인 전사 3명에 달하는 극악의 패전을 당했고 이후에는 거의 싸움을 포기한다. 거의 같은 시기인 1863년에 일본은 일본 국가가 아닌 한개의 번인 싸쓰마가 영국과 독자적으로 전쟁(1862)을 하였다. 그 결과 영국의 승리긴 했지만, 일본은 영국의 증기선 1척을 대파하고 13명의 전사자를 만들었고, 그리고 일본군에서는 10명 이하의 전사자를 기록한다. 이 기록에서 우리는 애초부터 국력의 차이가 있었지만 더 극명한 차이는 단순히 전쟁의 수행결과가 아니라 이후 두 국가의 행보 때문에 벌어진다. 조선은 미국, 프랑스와의 전쟁 후 나라의 문을 굳게 잠그게 되고 일본은 이러한 충격을 기점으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일본의 성공을 이와쿠라 사절단이나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엘리트들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일본의 이러한 성공을 우연한 소수의 리더의 등장이 아닌 구조적 요소에 주목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지리적 요소의 한계 때문이었을까

구조적 요소의 대표적인 지리적인 요소가 있다. 지리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현대사회의 현상을 실패하는데 한계가 많기도 하지만 정치나 제도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고 세계적으로 차이가 적었던 근대 혹은 이전의 사회를 평가하는 것에는 상당히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지리적인 요소에서 조선은 근대화에 있어서 최악의 포지션이었다. 한반도는 육로로 연결된 중국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항상 놓였으며, 그 영향력은 중국에 안정적인 통일왕조가 들어섰을때 특히 강했다. 근대화가 필요했던 시기, 중국은 청나라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왕조로 자리하였으며, 서쪽으로부터의 정보는 중국에 의해 변질되어 전달되었다. 예를 들어서,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를 조선은 청의 승리로 알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일본열도가 방파제처럼 자리하여 서양을 옛날부터 일본과 주로 교류하였다. 그러나 지리적인 한계에도 분명히 기회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에도 그러한 한계 내에서도 개혁의지가 있던 인물들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폐쇄적인 국가시스템을 바꾸는데 실패한다.


상대적으로 탈중앙화된 일본의 경쟁적 봉건제

첫문단에서 소개했던 사쓰에이 전쟁을 다시 짚어보면 재밌는 점은 조선에 비해 훨씬 좋은 교환비를 낸 점보다 일본 중앙정부가 아닌 행정구역 중 하나인 사쓰마 번이 독단적으로 영국과 전쟁을 벌였다는 점이다. 조선에서는 이런 전쟁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조선은 굉장히 중앙집권적인 체제였기 때문에 지방정부에서는 적절한 형태의 상비군을 갖추고 있지도 않았다. 반대로, 일본은 유럽의 봉건제와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중앙집권체제에도 불구하고 다이묘라 불리는 지방의 영주들의 세습 행정구역이 따로 존재했으며 이들은 상호간의 경쟁 형태를 띄었다. 따라서, 각 번은 각자의 군사력 또한 갖출 필요가 있었다. 막부의 통일과정은 명분이 아닌 힘에 의한 지배였기 때문에 각 번은 중앙정권의 힘이 약해지면 언제든 배신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일본의 문화는 충성과 의리보다는 힘이라는 실리에 기반한다. 실제로, 미국 페리 제독에 막부가 굴복하는 형태(쿠로후네 사건, 1853)를 보이자 그때부터 각 번은 막부 타도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경쟁 속에서 일본은 근대화를 이끄는 엘리트들이 탄생하고 지방세력의 결합인 삿초동맹(1866 결성)은 막부를 타도한다. 그리고 이후 그들은 세계 2차대전 속에서 폭주하는 일본 군부의 주축세력이 된다.


중앙화된 조선은 지방의 경쟁력을 극히 제한했다

생각해보면 중앙집권체제는 그렇지 않은 체제보다 더 강한 경제력도 군사력도 보유하는게 가능하다. 하지만, 조선의 중앙집권체제는 왜 적절한 경제력도, 상비군도 갖추지 않는 시스템에 다다랐을까? 먼저 경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착취적 경제제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인들은 전혀 노동을 하지 않았으며 일천즉천에 따른 수많은 노비들은 당연히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 구한말이 되지 않는 이상 신분이동은 불가능 했으며, 경제적으로 성공하더라도 사회에서 인정을 받기 힘들었다. 군사적인 관점에서는 더 아이러니하다. 조선은 이성계라는 전설적인 무장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1592년에 시작된 일본과의 다년간의 처절한 전쟁, 그리고 두차례 이어진 중국과의 전쟁을 통해 군사력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낄만한 과정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의 전쟁 시기 조선의 왕이었떤 인조는 쿠테타로 왕이 된 인물이었으며 집권 후 국경을 지키던 정예 군대의 반란을 겪었다는 맥락이 조선에는 적용된다. 그 이유로 지방군의 반란 가능성에 대해 극도로 염려하여 지방의 상비군을 두는 형태가 아닌 침공당할 시 중앙정권의 지도를 통해 지방군을 조직하는 다소 비효율적인 형태로 제도를 정비한다. 정세가 안정적이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스스로 지방 방어를 수행하는 시스템을 해체한 직후 벌어진 전쟁에서 왕은 자신의 수도 근처의 산성에서 청나라의 기동부대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만다.


온전한 탈중앙화는 가능하지도 않으며 일정수준의 중앙화는 필요하다

중앙화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중앙화된 것이 없다면 무언가 추진될 수가 없다. 뜨거운 감자인 암호화폐가 탈중앙화 속에서 이렇게 발전하는 이유는 사실 탈중앙화 때문 뿐만이 아니다. 리플과 같은 대표적인 중앙화된 암호화폐가 아니더라도 탈중앙화를 외치며 암호화폐 개발을 이끄는 수많은 팀들이 사실은 중앙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실패하는가>를 다시 인용해보자면 최소한의 중앙집권정부의 필요성에 대해 논할때의 예시가 소말리아다. 소말리아는 탈중앙화가 잘되어있지만 중앙정부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또한, 같은 수준의 탈중앙화처럼 보여도 그 형태는 여러가지 이며 그 탈중앙화가 구조적으로 인센티브를 효율적으로 추구하게 만드는지도 중요하다. 왕의 권위가 약했던 폴란드나 헝가리의 경우 왕의 권위는 약했지만 그 권력이 일반 백성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순전히 정치 귀족에게 몰린 형태였다. 그들은 폴란드를 주변강국에 쪼개버리는 결과를 나았고 헝가리는 귀족들의 욕심에 오스트리아로 왕위를 수백년간 넘겨버린다. 각자 추구할 인센티브가 있는 탈중앙화가 국가 시스템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것이 불가능한 지역들을 생각할때는 안타깝다. 과거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영역, 그리고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이 그 예시이다. 자신을 위하는 정부가 존재한다거나 사유재산이 보장받는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보니 정부가 추진하는 어떠한 제도를 통해 각자의 인센티브를 추구할 수가 없게 된다. 식민지화의 진정한 상처는 착취당한 경제적 규모가 아니라, 이러한 지속적인 착취에 의한 의식의 파괴라고 볼 수 있다. 의식의 관성은 매우 강하기에 한 번 형성된 것은 바꾸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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