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성 PD 다이어리(4)
직업은 편성 PD지만 사실상 채널 살림을 도맡는 역할을 하다 보니 편성 외 채널 업무도 여럿 해야 한다. 채널 브랜딩이나 연간 예산 관리 같은 오랜 고민이 필요한 업무도 있고, TV 온에어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경품을 보낸다거나 시청자 문의 전화를 대응하는 즉각적인 일도 한다. 방송사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회사에는 CS팀이 따로 없기에 채널에 관한 문의는 채널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롯이 막내의 몫(사실 막내의 몫인 것도 문제!).
채널에 전화를 주는 분들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방송을 보고 궁금한 점이 있는 분들. 저렇게 광활하고 푸른 바다가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딘지, 저 연예인이 저렇게 야무지게 음식을 먹는 식당은 도대체 어딘지 혹은 전화한 본인도 이 방송에 출연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등등. 대게 이런 분들은 원하는 답변을 들으시면 즐거이 보던 TV 속으로 되돌아간다.
문제는 두 번째 유형의 시청자이다. 방송을 보고 기분이 언짢은 분들. 솔직히 말하면 이 분들은 대하기가 많이 어렵다. 애초에 문의를 하고 답변을 들으려는 목적이 아닌 화풀이하려고 전화 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 지인과도 통화를 잘하지 않던 나의 입장에선 낯선 이의 성난 목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얼굴을 맞대고 얘기한다면 손짓 발짓 섞어가며 대화를 할 텐데. 수화기 너머 전해오는 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롭다.
광고가 너무 많다며 윽박지르기도 하고, 어떤 출연자가 꼴 보기 싫다고 빼라고 소리 지르기도 하고, 지금 하는 방송 때문에 심리적 피해를 봤다며 고소하겠다며 협박하기도 한다. 저마다의 이유로 자신의 항의(를 빙자한 욕설)가 정당하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처음 이런 전화를 받았을 때는 많이 당황했고 놀랐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욕설과 화풀이. 시간이 흐를수록 무뎌져 나름의 노하우가 생기기도 했고, 전화받으며 당황해하는 후배의 전화를 건네받아 해결하기도 했다. 같이 일하는 많은 동료들이 같은 과정과 감정의 파고를 겪었다. 전화를 끊고 눈물을 흘리는 동료도 있었고, 전화기를 던지는 동료도 있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시청자 전화 연결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전화 예절을 안내하는 음성이 통화연결음에 포함되었다가 현재는 홈페이지 문의로 대체되어 한결 쾌적한 근무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는 비단 우리 만의 문제는 아닐 테다. 사회적 이슈로 많이 대두되었음에도 여전히 많은 CS 담당자들이 이러한 감정 노동을 하고 있지 않을까. 당연한 것이 등한시되는 일들이 반복되면 안 된다. 뻔한 이야기지만 본인이 듣기 싫은 말은 내뱉지 않는 게 맞다. 화풀이는 다른 곳에서!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성숙한 하루이기를 스스로 먼저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