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1월 15일로 올해의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대보름이다. 잊고 있었는데 오늘이 대보름 전야. 오곡밥과 나물을 먹는 날임을 낮에 친구의 카톡을 보고 알았다. 부지런한 친구는 어젯밤 몇 가지 나물 반찬을 했다며 가지러 오라고 한다. 가고 싶었으나 오늘 여건이 어려워 마음만 받았다.
찾아보니 오곡밥을 먹는 역사가 꽤 오래된 전통이다. 신라시대 소지왕(21대 왕) 때부터 정월대보름이 되면 일반 백성들은 오곡밥을 지어먹으며 한 해의 액운을 막고 건강과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 오곡밥의 재료인 찹쌀, 차조, 찰수수, 찰기장, 붉은팥, 검은콩에는 실제로 건강에 좋은 성분이 다양하게 들어 있기 때문에 오곡밥을 먹는다는 것은 액운은 막는다는 것의 의미도 있지만 건강을 위한 식사인 것이다.
출처: 핀터레스트
우선 찹쌀은 성질이 따뜻하고 소화가 잘돼 속을 편안하게 해 주고, 조와 기장은 항산화 작용을 하는 베타카로틴과 함께 식이섬유, 무기질, 비타민이 풍부한 식품이다. 붉은팥과 검은콩은 안토시아닌이 많이 들어 있어 눈 건강과 콜레스테롤 억제에 도움이 되며, 갈색 수수는 폴리페놀이 많아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며, 혈당 조절에 도움을 주어 당뇨와 고혈압 예방에 좋은 식품이다. 현대에 와서야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지만 그 옛날 이런 것을 알고 골고루 섞어 밥으로 해 먹은 조상님들이 지혜는 놀랍기만 하다.
나도 오곡밥을 할까 하여 잡곡을 보니 찹쌀과 현미, 보리뿐이다. 콩을 넣으면 아이들이 싫어하니 그냥 현미와 찹쌀, 보리만 넣고 딸아이에게 밥 짓는 것을 부탁했다. 그냥 갈치 구이만 해서 먹을까 하다가 오늘도 명절인데 싶은 마음에 그냥 보내면 괜히 서운할 거 같았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시절에는 대보름 명절도 잘 챙겨 나물반찬과 오곡밥을 꼭 해서 먹었는데 분가 이후 잘 챙기지 않게 되었다. 반찬가게에 가서 급한 대로 나물 몇 가지를 사 와 저녁을 차렸다.
반찬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는 몇 분 동안 정말 많은 분들이 나물과 예약해 놓은 오곡밥을 사 가셨다. 나도 진즉 알았다면 예약을 해 둘걸 싶다. 반찬이 다 떨어져 10여분 정도 다시 만들어지길 기다렸다. 사장님은 반찬을 포장하고 팔고, 2층에 올라가 만들어진 반찬을 가져오시고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으신 듯했다. 오늘 너무 많이 바쁘셨다고 한다.
나물 4팩에 만원. 아들이 고른 소고기 장조림 4천 원. 당면은 거의 없고 채소만 남은 마지막 잡채 5천 원.
19000원을 결제했다. 사장님은 내게 인사를 상냥하게 하고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두부조림 한팩과 꽈리고추 작은 팩을 서비스라고 더 주셨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웃으며 받는다. "잘 먹겠습니다 사장님~!" 큰 소리로 인사하고 왔다. 다음에 또 가야지 생각하며...
반찬가게 덕분입니다.
잡채는 내일 당면만 넣고 다시 만들기 위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칼질이 느린 내게 채소가 가득한 잡채는 더 감사한 선택이었다. 천천히 갈치를 구우며 사온 반찬들을 접시에 담았다.
아주까리 나물, 무생채, 고사리,?(알려주셨으나 까먹었다), 소고기 장조림, 딸아이가 만든 계란 장조림, 서비스로 주신 두부구이, 꽈리고추 볶음까지 식탁에 차려놓으니 오랜만에 식탁이 가득했다. 한 그릇 음식만 먹던 요즘인데 반찬을 차려 놓으니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가슴이 뿌듯해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혼자서 이렇게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려면 장도 따로 보러 가야 하고, 준비하고 만들고 정리하는데 최소한 2시간 이상은 걸렸을 것이다. 맛있게 많이 먹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오랜 시간 걸리고 준비해도 괜찮지만 아이들은 거의 먹지 않는 나물반찬이다. 준비해 놓고 잘 먹지 않으면 괜히 서운하고 속상하다. 아이들은 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만들고 먹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내 모습이 참 별로였다.
아이들은 예상대로 나물을 제외한 반찬을 맛있게 먹었고, 나와 남편은 나물반찬을 맛있게 먹었다.
잡채를 제외하고 14000원이니 이만하면 시간과 만족도 면에서 꽤 경제적인 값이다. 아직도 나물 반찬은 남았고, 내일은 비빔밥을 해서 먹을 예정이니 나의 메뉴 고민도 해결해주고 내게는 일석이조의 효과이다.
변화하는 시대, 오랜 시간 조상님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통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려면 내 상황에 맞게 지켜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옛날처럼 굳이 나물을 말려놓고, 며칠 전부터 불려놓고, 한 끼의 밥을 위해 몇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문만 열고 나가면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는 세상이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누릴 수 있는 편리함은 누리고, 지킬 수 있는 전통을 지켜가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 직접 반찬을 만들지 않은 내게 변명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