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할머니4. 누런 종이 더미

by 김카잇

가난을 해결하기에 할머니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자식, 손주들 굶기지 않는 것. 그것이 마지노선이었다. 공짜로 얻어오고, 외상으로 얻어오고. 그것도 더 이상은 어려웠는지 할머니는 폐지 줍는 일을 시작하셨다. 허리도 제대로 펴지지 않는 그 몸으로, 하루 종일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박스나 폐지를 주워 팔면 받는 돈은 몇 천 원 정도였다.


아빠는 이번에도 못마땅해했다. 박스 주우러 다니지 말라고, 동네 망신시키지 말라고 그렇게 구박을 했다. 한 푼도 벌어오지 못하는, 아니 벌어오지 않는 아빠가 왜. 아빠는 왜 할머니의 건강보다 자신이 망신당하는 일이 더 걱정이 되었던 걸까. 그 나이 되시도록 고생시켜서 죄송하다고, 폐지 줍는 일은 힘드니 다른 일을 알아보시면 나도 일거리를 찾아보겠다고 그런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하지. 그 몇 푼 안 되는 돈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끼니를 챙기고, 학교 준비물을 샀는데. 그래서 우리가 할머니에게 죄송해하고 감사해하고, 할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건데. 왜 아빠만 그런 마음이 없었을까.


폐지를 팔아서 번 돈은 단 몇 푼이지만, 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할머니가 폐지를 줍다가 누렇게 색 바랜 A4용지 더미를 발견했는데, 나 연습장으로 쓰라고 갖다 주셨다. 초등학교 4-5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반은 집에다 두고 썼고, 반은 학교 책상 서랍 밑에 넣어두고 썼다. 친구들은 색깔 때문에 그 종이를 ‘똥지’라고 불렀다. 친구들의 낙서장이나 오목판으로 애용됐던 똥지는 내가 친구들에게 베풀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똥지는 시 쓰는 재능이 있던 나의 시집이 되기도 하고, 만화 그리기 동아리에 속해있던 나의 만화책이 되기도 했다. 집에서는 똥지를 좀 특별하게 사용했는데, 내가 좋아하던 프로레슬러들을 그리고 오려서 종이 인형으로 만들어서 가지고 놀았다. 가장 좋아하는 선수를 챔피언으로 만들어서 종이 챔피언 벨트를 채워주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나 자신을 프로레슬러로 만들어서 꿈을 이뤄보기도 했다. 그 보잘 것 없는 종이인형을 얼마나 잘 가지고 놀았던지. 인형놀이에 몰입한 어린 내 모습은 서른이 넘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아빠의 술주정이 시작되고 삭막해진 거실, 아빠를 피해 들어간 방 안. 문을 걸어 잠그고 나는 그 누런 종이 위에 내 세상을 그렸다. 누군가는 내가 그 좁은 세상에 갇혀 버릴까 봐 걱정했지만, 나는 넓고 괴로운 세상 속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빛바랜 세상이라고 놀려댔지만, 나는 다 타버린 재색빛 세상 속 한 줄기 빛 같은 세상이라 생각했다. 폐지를 줍는 고되고 서러운 그 순간에도 손주에게 줄 무언가를 찾아오셨던 할머니 마음이 아니었다면 나의 세상은 더 고되고 서러웠을지 모른다.


그 종이더미의 마지막장을 쓸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새 연습장을 사서 써봤지만 똥지만큼 애용하지는 않았다. 그땐 이미 종이인형 따위는 없어도 되는 나이가 되어서였을까. 아니면 그 연습장이 할머니가 주워다 준 누런 종이더미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지금도 폐지 줍는 어르신들을 보면 “이거 태형이 연습장 할래?”하며 종이더미를 건네주던 우리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다정한 목소리가, 미소 띤 얼굴이 떠오른다.


브런치 (7).png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17화할머니3. 털 붙은 고기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