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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2. 나는 트로트가 좋아요

by 김카잇

몇 년 전, 가수 현철 씨가 별세하셨다는 소식에 이어, 얼마 전에는 가수 송대관 씨가 별세하셨다는 뉴스를 접했다. 죽음이란 언제나 무거운 말이지만, 두 분의 죽음은 왠지 더 무겁게 다가왔다. 그들의 노래를 생각하면 늘 함께 떠오르는 한 사람 때문이다.


경남 마산의 한 주공아파트 105동 401호.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큰방에서는 재롱잔치가 열린다. 트로트를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 카세트를 틀어놓고, 노래도 부르고 엉덩이춤도 추는 손주들.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는 할머니 얼굴이 보인다. 친구들이 동요를 부를 때, 나는 송대관, 태진아, 설운도, 현철, 트로트 4대 천왕의 노래를 불렀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 같다. 내가 트로트를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니, 트로트를 좋아한 것보다 할머니의 웃는 모습이 좋았던 것 같다.


할머니는 가끔 나에게 노래를 가르쳐달라 했다. 그때 가르쳐드렸던 노래가 송대관의 네 박자,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 현철의 사랑의 이름표 같은 노래들이었다. 구깃구깃한 종이에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맞춤법 틀린 단어들. 열심히 적은 가사가 잘 보이지 않으면, 가사 종이를 두 눈에 가까이 두었다가 멀리 두었다가 하면서.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박자를 맞추면서. 한 곡을 다 부르고 나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셨다.


하지만, 할머니 얼굴에 주름이 하나씩 늘고, 내 키가 1cm씩 자라면서 우리 집 재롱잔치, 우리 집 노래교실은 뜸해졌다. 나는 카세트보다 컴퓨터를, 트로트보다 최신 가요를, 할머니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노래는커녕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일도 뜸해졌다. 그 시기 우리 집은 매우 어려웠고, 그래서 나의 사춘기는 더욱 차가웠다.


그러던 중학생 때였다. 언젠가 할머니가 “태형아, 노래 한 곡 불러봐라.”하셨다. 나는 “노래는 무슨 노래.”했다. “어릴 때는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드만...” 나는 뭐가 그리 부끄러웠는지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쿵하고 닫았다. 친구들이랑 노래방에 가면 2시간 내내 부르고 출 수 있는 걸 그때 할머니 앞에선 뭐가 그리 부끄러웠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할머니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을 거란 걸. 그래서 난 그때를 뼈저리게 후회한다.


나는 지금도 트로트를 좋아한다. 노래방에 가면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불렀던 노래들을 즐겨 부른다. 언젠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꿈에 찾아와 “태형아, 노래 한 곡 불러봐라.” 하시면 그때는 주저 말고 부르려고. 까짓것 엉덩이도 마구 흔들면서. 평생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꿈에서라도 할머니 웃는 얼굴 한 번 볼 수 있다면 뭘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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