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며. 나쁜 이야기만 잔뜩 쓴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 아빠가 첫째인 형을 얻고 '아버지'라는 이름을 갖게 된 지가 어느덧 38년. 그 긴 시간 동안 우리 삼 남매에게 아빠와의 좋은 추억이 단 하나도 없다고 말하긴 어렵다. 안 좋은 추억이 압도적으로 많아 좋은 추억이 파묻혀버렸을 뿐.
얼마 전 형과 카톡을 하는데 이런 말을 했다. “아빠랑 좋았던 기억은 딱 하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집에서 치킨에 소주 먹은 기억 밖에 없다. 그때 처음으로 아빠랑 술 한 잔 하면서 아빠와 아들로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좋더라.” 형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아빠에게 바란 건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 평범한 아빠와 아들딸이 되는 것. 그뿐이었다.
내 기억을 더듬고 파내지 않아도 떠오르는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초등학교 3-4학년 때쯤 맞은 크리스마스. 나는 동생과 나란히 방에 누워 자고 있었다. 열두 시쯤 되었을까. 아빠가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잠을 깼다. 우리 머리맡에 손목시계 하나씩을 놓고는 우리를 깨우지도 않고 방을 나갔다. 술에 취해 비틀비틀 대면서. 그동안 아빠에게 생일 선물도, 크리스마스 선물도, 명절 용돈도 받아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특별한 날에도 뭐 하나 바란 적이 없었는데. 기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인지 배로 기뻤다. 그 싸구려 손목시계가 고장이 난 후에도 한동안은 차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늘 악마였던 아빠가 딱 하루 산타였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아빠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덕동 하수처리장 관사에서마저 나가야 했던 날. 퇴근한 아빠는 무릎을 꿇은 채 양손으로 중학생이었던 나, 초등학생이었던 동생을 꼭 안고 펑펑 울었다. 이제 진짜 어디서 살아야 하나 하는 막막함의 눈물이었을까. 그날을 ‘좋은 기억’으로 기억하는 건, 자존심을 내려놓고 거짓 없는 아빠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눈물 콧물 범벅이었던 아빠의 얼굴과 내 옷자락을 꼭 붙잡고 있던 아귀힘이 생생한 걸 보면, 나는 그런 인간적인 아버지가 그리웠나 보다. 다시 모텔, 찜질방을 오가는 삶이 시작될 걸 알았지만, 그런 아버지와 함께라면 그래도 살만할 거라 생각했다.
많은 이유로 악마가 되었지만, 우리 아빠도 아주 가끔 산타였고, 슈퍼맨이었고, 때때로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늙어서 그런지 인간적인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다. 죽어도 배우지 않던 문자 하는 법을 배워, 전화를 귀찮아하는 우리에게 문자를 보내고. 얘기만 나오면 욕을 뱉던 엄마에 대해서도, 젊은 엄마가 인형 같이 예뻐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드물지만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하며, 술, 담배도 예전보다 많이 줄이셨다.
그렇다고 아빠에 대한 원망이 한순간에 사라지진 않겠지만. 여전히 아빠와의 거리 조절이 필요하지만. 이제 좀 살만하다는 생각은 든다. 더 이상 지옥 같은 날들은 아니니까. 이제는 정말 아빠에게 한 발짝 다가가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할머니에 대한 글을 쓰면 다시 아빠가 미워지겠지만, 할머니도 우리가 아빠를 미워하는 걸 원하지 않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