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삼 남매 모두 성인이 되고 부산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마산에 혼자 살던 아빠는 큰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는 대구로 거처를 옮겼다. 치매를 앓고 있는 큰아버지를 돌보고, 할머니를 돕겠다는 명목이었다. 분명 팔십 먹은 노모 혼자 치매 걸린 아들을 보살피는 건 힘든 일이었다. 큰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는 일 같은 힘쓸 일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빠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대구로 가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첫째, 살 곳이 없었다. 형이 힘들게 마련해 준 보증금을 걸고 들어갔던 원룸. 마산에 집만 마련해 주면 일도 하고, 돈도 벌며 스스로 먹고살겠다 했지만 아빠는 그러지 않았다. 돈이 없으니 월세를 낼 수 없었고, 결국 보증금도 돌려받지 못하고 집에서 쫓겨났다. 둘째, 노리는 게 있었다. 큰아버지와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였고, 몇 푼 안 되지만 매달 생활비가 나왔다. 아빠는 할머니와 큰아버지를 돌보며, 기초생활수급비도 본인이 관리했다. 몇 푼 안 되는 돈이었지만, 술도 사 먹고 담배도 사 피울 수 있는 소중한 돈이었다.
어떤 날은 큰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는 게 힘들다고. 더 이상 이렇게 못 살겠다고. 대학생이었던 우리에게 대출을 받아 마산에 집을 구해 달라. 두 사람은 요양원에 보내라 화를 내더니. 두 사람을 요양원에 보내면 기초생활수급비가 요양원으로 입금된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고. 그래도 아들로서, 동생으로서 도리를 다하겠다고. 이 집의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아직 취업도 하지 않은 자식들에게 돈을 구해오라며 화를 내고, 노모와 치매 걸린 형 앞으로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 몇 푼에 기대어 사는 아빠를 우리 가족 그 누구도 가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아빠는 몰랐을까.
그리고 아빠는 할머니의 장례식 날, 눈곱만큼 남아있던 가장으로서의 지위마저 잃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빠는 얼이 빠진 채로 술만 마셨다. 우리 가족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는 것 같았던 아빠의 지인들은 오지도, 돈을 보내오지도 않았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형이 모아둔 돈과, 내 지인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부조금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할머니의 유골함을 고르는 그 순간에도 아빠는 아무 의견도 내지 못했다. 초라하기 짝이 없었던 그 모습이 차라리 어머니를 하늘로 보낸 슬픔과 충격, 더 잘해드리지 못한 참회로 인한 것이었다면 좋겠다.
아빠가 시킨 대로 해라, 아빠가 하잔 대로 해야지, 아빠 말 좀 들어라. 아빠 친구 딸 결혼식이 있는데 축의금 내게 돈 좀 보내라, 그래야 나중에 니 결혼할 때 돌아오지. 할머니 장례식 때 아빠 지인들이 어떻게 했는지 잊은 건가. 형이 결혼할 때 그 어떤 지원도 해주지 않았고, 아빠의 지인으로부터 들어온 축의금마저 자신의 돈이라고 가져간 것도 잊었나. 아빠에게 10만 원을 송금하면서 그 돈이 어떤 방식으로라도 나에게 긍정적으로 돌아올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혼자 힘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몇 년간 학자금 대출, 생활비 대출금을 모두 갚고, 이제야 적게나마 저축을 시작한 나. 나는 대학생, 아니 어쩌면 그전부터 스스로를 가장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게 가장 마음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