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삶. 내가 아는 건 고작 죽기 전 30년 정도뿐이지만. 기구한 삶이란 말이 딱 맞다. 어릴 때 공부도 잘하고 착했다던 큰 아들은 두 번의 이혼을 겪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이 괴로워서였을까. 노모보다 먼저 치매에 걸리고, 세상도 먼저 떠났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것도 서러울 텐데, 장례비용도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탓에 제대로 된 장례식도 치러주지 못하고 집에서 큰 아들을 보냈다.
작은 아들 역시 문제가 많았다. 공무원이 되고, 결혼까지 했으니 뒷바라지는 끝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작은 아들은 씀씀이가 헤펐고, 폭력적이었다. 며느리는 집을 나가버렸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졌다. 작은 아들은 술, 담배, 노름에 의지하며 하루하루 살아갔다. 아들에게는 어린 삼 남매가 있었는데, 그 아이들을 돌보는 건 다시 한번 노모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의 폭력성을 감당하는 것까지도.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면, 작은 아들의 술상을 차리기 위해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니거나, 외상을 하러 다녔다. 월세가 몇 달이나 밀려, 집주인에게 구박을 받고, 외상값이 쌓여 가게 주인에게 한소리 듣는 날도 많았다. 태어난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울 나이에. 몇 푼 안 되는 그 돈 때문에. 남들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온갖 무시를 당해야 했던 우리 할머니.
그 서러움을 가족에게라도 좀 풀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가족들마저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아빠에게 서운한 얘기를 조금이라도 하는 순간, 와장창 하고 밥상이 엎어졌다. 우리 삼 남매는 아빠가 상을 엎고 화를 내는 그 순간이 싫어, 오히려 할머니에게 아빠에게 말대꾸하지 말라며 짜증을 냈다. 아빠는 회사에, 우리는 학교에 있던 그 시간. 동네 경로당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점당 10원짜리 고스톱을 치는 게 할머니의 유일한 낙이었다. 사춘기라는 핑계로 할머니의 말동무가 되지 못했던 그때의 내가 정말 밉다.
제 몸 하나 끌고 살아가기도 힘든 그 나이에도, 못난 두 아들과 손주들까지 등에 지고 살아가야 했으니, 허리가 그렇게 굽어버릴 수밖에. 가족을 위해 온갖 괴로운 일들을 짊어지고, 작은 유모차 한 대에 의지하며 느릿느릿 걸어가던 사람. 할머니의 시간이 그 걸음처럼 천천히 갔다면 좋았을 걸. 아니, 어쩌면 그건 나의 욕심일지 모르겠다. 할머니 스스로에겐 너무 고되어 죽음보다 못한 삶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죽기 전부터 삶의 기억을 조금씩 지워버렸던 것 아닐까.
할머니의 삶을 떠올리고 글로 쓸 때마다, 내 가슴은 찢어지고 내 눈시울은 붉어지겠지만 그럼에도 이 글은 꼭 써야 한다. 나는 우리 할머니의 희생과 사랑을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울 수 있는 건 우리 할머니 덕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