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 인터뷰 2. 그래픽 디자이너 한승이를 만나다
자유로운 영혼
그녀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 구태의연한 수식어만큼 그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달리 없다는 것을.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진정한 '자유'란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클라이언트가 의뢰한 작업물 앞에서는 철저히 주관을 버리되, 본인의 삶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뚜렷한 신념을 고수하는 여자. 그래픽 디자이너 한승이와의 대화는 버릴 것이 없었다. 너무 짧아서. 너무 명료해서. 너무 매력적이어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이름 한승이. 나이는 39살. 직업은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입니다. 네 살 많은 신랑이랑 같이 10살, 8살 남자아이 둘을 키우고 있어요.
굳이 나이는 안 밝히셔도 되는데요?
굳이 숨길 이유도 없어서요.
문송합니다만 '그래픽 디자인'이란 어떤 일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쉽게 말해 인쇄가 가능한 모든 것들을 보기 좋게 디자인하는 일이에요. 인쇄물, 웹페이지, 책 표지, 포스터, 패키지, 간판 등을 디자인하는 작업을 아울러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합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서 이런 평면작업물을 보기 좋게, 예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고요.
심플하면서도 엣지있게, 시크하면서도 따뜻하게, 발랄하면서도 진중하게 등등, 저세상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으로 인한 디자이너의 고충은 익히 들은 바 있습니다. 더군다나 프리랜서로 일하고 계신데요. 어떻게, 일하기 괜찮으신가요?
클라이언트는 두 부류로 나뉘어요. 요구사항이 명확한 고객과 불명확한 고객. 딱 이 두 부류인데 후자라고 해서 자기주장이 없는 건 또 아니거든요.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읽어서, 그들이 원하는대로 맞춰주는 것, 까지가 저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돈을 내고 작업을 의뢰할 때는 어느 정도 전문가의 감각을 빌려쓰길 원하는 게 아닐까요?
물론 그렇죠. 하지만 나의 감각과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충돌할 땐, 무조건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우선이에요. 클라이언트의 의견을 배제하고 내가 보기에 좋은대로 작업하면 절대 승인이 안 나요. 디자인은 주관적인 거라서, 내 성에 안 차도 클라이언트의 마음에 들면 그게 바로 성공적인 디자인이더라고요. 의뢰받은 작업에 있어서는 내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제 작업원칙이에요. “세상은 넓고 취향은 제각각이다."를 늘 되새깁니다.
디자이너로서의 소신을 갖되 직업인으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모습이 멋지십니다. 외주일 외에도 하고 계신 작업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많았는데, 지금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래도 계속 뭔가를 하려고 해요. 일이 없는 상태를 못 견디거든요.
일단 돈이 되는 일은...키링과 네임택, 소품 등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어요. 제가 제품디자인을 하면, 3D프린트업체를 운영하는 동업자가 실물로 만들어주고요. 현재 인터넷 쇼핑몰에서 판매중인데 가끔 유치원이나 기업체에서 들어오는 단체주문이 쏠쏠해서 제법 일할 맛이 나네요. 얼마 전엔 유명 화장품 브랜드에서 대량주문이 들어왔어요. 베스트셀러 패키지에 제가 디자인한 키링이 함께 증정된대요! 너무 신나요!
와우 성공한 사업가시네요. 축하드려요. 그런데 돈 되는 일이라고 하시면...돈 안 되는 일도 하고 계시단 말씀인가요?
당장 돈은 안 되지만 재미로 하고 있는 일은 여러가지예요. 대표적인 게 날필이랑 같이 하고 있는 날숭이 브런치. 날필이 글을 쓰면 제가 그림을 그려 업로드하는 방식인데, 돈은 안 되지만 재밌어요. 언젠간 잘 될거라는 믿음이 있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후회없어요. 남는 시간에 놀면 뭐하나요, 뭐든 해야지.
네, 돈 안 되는 일은 저랑 하시고, 돈 좀 되는 키링사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동네언니랑 플리마켓에 갔다가 아크릴로 만든 키링을 판매하는 걸 봤어요. 예쁘긴 한데 막상 돈 주고 사려니까 이건 나도 만들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나 이런 거 백 개도 더 디자인할 수 있다고, 그랬더니 언니가 반색을 하면서 그럼 같이 만들어볼래? 하는 거예요. 언니네 신랑이 3D프린트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거기도 코로나 여파로 일이 많이 줄었나봐요. 그 길로 의기투합하게 된 거죠. 항상 화면이나 지면상에서 평면적인 작업만 했는데, 키링작업은 입체적인 실물이 나오니까 되게 재밌어요.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사업가, 그림작가, 여러가지 직무와 이름 중에 나의 본캐라고 생각하는 것, 본업을 꼽는다면요?
엄마죠. 제 본업은 엄마예요.
너무 의외의 대답이 나와서 잠시 말을 잃었네요. 맞는 말씀인데 말씀하시는 분과 너무 매치가 안 돼서...죄송합니다, 그럼 질문을 바꿀 게요. 장래희망이 뭐예요?
"유명한" 그래픽디자이너요. 선만 그어도 몇백만원씩 받는.
와, 저는 브런치작가 신청할 때 '장당 7만원 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썼다가 떨어졌는데. 저랑은 비교도 안 되게 배포가 크시네요. 선 하나에 몇 백이라...꿈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큰 거 아닌가요?
일단 화폭을 크게 잡아야 현실에 타협해도 그나마 큰 게 나오죠.
명언이네요.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업은 엄마잖아요. 이렇게 큰 꿈을 품고 육아에 전념하는 시간이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엄마로 지내면서 프리랜서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정확하게 말하면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게 된 건 아직 아이가 없을 때였어요. 결혼하고 중국 상해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건강문제로 그만두고 집에 있으니 좀이 쑤셔 죽겠더라고요. 상해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지다가 일러스트레이터를 구하는 공고글을 통해서 일을 구했어요. 보수가 생각보다 너무 쎄서 놀랐는데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었어요. 베이징지도를 일일히 손으로 다 그려야 했는데 결과물이 꽤 만족스럽게 나왔어요. 그즈음에 첫애를 임신하게 됐고 첫애 출산 전까지 그 회사랑 몇 건의 작업을 더 진행하면서 "이쪽 분야에서는 내가 맘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죠.
첫애 임신 중에 한국에서 열리는 공모전에 닥치는대로 응모했고, 4-5개 정도의 공모전에서 줄줄이 수상했어요. 한 카페 프렌차이즈업체가 주최한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해서 제가 디자인한 패키지가 전국매장에서 쓰이기도 했고요. 그러다 아이 둘 낳고서 2014년에 중국생활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왔더니 도로 제자리. 좀 허무하긴 했죠. 수상경력이 지속적인 일로 이어지진 않으니까요.
다시 한국 구인구직사이트에 들어가서 일을 찾았어요. 장당 3만원짜리 그림을 10장씩 그려주기도 하고. 근데 그 돈마저도 못 받았어요. 일만 해주고 돈을 못 받는 일이 세 번 있었는데, 화딱지는 나지만 애들이 어리니까 따질 여력이 안 돼서 집어치웠죠 뭐.
지금도 꾸준히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계신데요, 키링사업도 그렇고, 날숭이 작업도 그렇고 다 손발이 맞는 파트너를 잘 만나셨어요. 어찌보면 지인들 덕분에 활동을 이어가는 게 아닌가요? 모두가 승이님처럼 지인과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건 아닐텐데요, 인맥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질문이 마음에 안 들어요.
첫째, 제가 지인들을 잘 만난 것도 맞지만, 지인들도 저를 잘 만난거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관계구요.
둘째,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생각처럼 잘 안 된다면 인맥이 없어서라기보다 재능이 없어서일 가능성이 커요. 인맥보다는 능력을 돌아봐야죠.
셋째, 재능과 인맥이 모두 갖춰져있다고 해도 거저 오는 기회는 없어요. 전 수시로 일감을 찾고 주위에 저를 어필했어요. 그림도 잘 그리고, 컴퓨터 작업도 잘한다고요. 지자랑한다고 남들이 고까워하든말든, 꾸준히 제가 저를 소문내다보니 기회가 닿은거죠.
어, 맞아요. 그거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난 다 잘해',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런 말을 막 숨 쉬듯이 하는거요.
허풍은 금물이지만 진짜 자신있는 건 어필해야죠. 심지어 옷가게에 가서도 저는 그래요. 저 옷 입어보는 거 정말 좋아하고 옷도 잘 입는다고. 협찬해주면 광고효과 좀 보실 거라고.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떠들다가 진짜가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언제까지나 가마니로 남을 뿐이에요.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벌이시는 것 같아요. 이토록 끊임없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나요? 가족, 아이들이라는 뻔한 이야기는 사양합니다.
그렇게 답할 생각 없는데요.
첫째,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된다"는 나의 좌우명.
둘째, 타고난 건강과 규칙적인 운동으로 쌓은 체력.
셋째, 개썅마이웨이.
첫째, 둘째까지 너무 좋았는데요, 아니 개썅마이웨이가 에너지랑 무슨 상관이에요?
상관있죠. 세상의 중심이 나인데, 열심히 살아야죠. 얼마나 신나요. 남의 평가는 신경 안 써요. 심지어 기계에서 나온 수치도 내 마음에 안 들면 안 받아들여요. 얼마전에 인바디체크를 했는데 근육량이 적은 편이라고 나오더라고요? 하! 내가 얼마나 수시로 운동을 열심히 하는데. 힘은 또 얼마나 센데. 차! 이깟 기계가 나보고 근육이 적대. 웃기고 있네. 코웃음쳤어요.
근데 인바디체크 결과는 좀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요? 기계를 비웃으시면 어떡해요?
아니 그 기계 분명히 고장난 거예요. 걔가 뭐라든 나는 근육량이 많아요. 인바디가 틀렸어요. 아무튼 고장임.
...<처질 때 극복하는 방법>을 질문으로 준비했는데, 쓸데없는 질문 같아요. 처진 적 없으시죠?
아, 요 근래에 처졌어요. 왜 처졌더라? 뭔가...되게...생각이 안 나요. 기분이 별로 안 좋았는데, 아니 근데 기분이 안 좋았던 이유를 상기해서 뭐해요? 또 기분만 안 좋아지겠죠. 기분이 처진다 싶으면 몸을 열심히 움직여요. 집도 수시로 정돈하고, 운동은 정말 열심히 해요. 하루에 스쿼트 백 개, 런지 백 개씩 하면 가뿐해요.
잠깐잠깐. 운동은 그렇다치고, 집을 수시로 정돈하는 게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고요? 아들 둘 집에서 가능한 이야긴가요? 넣으면 꺼내고 올리면 내리고 닫으면 열어놓는 게 애들이잖아요.
애들 어릴 때부터 거실만은 사수했어요. 너네 방은 돼지우리로 만들어도 상관없다, 대신 거실은 같이 쓰는 공간이니까 너네 물건으로 어지럽히지 말라고 누누히 말했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애들이 거실은 그다지 어지르지 않아요.
아들들이 협조적이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할 때 '엄마라서' 느끼는 고충이 있나요?
시간제약이요. 그래도 큰애 9살, 작은애 7살 되고부터 부쩍 살만해졌어요. 자기들끼리 나가서 놀고 오기도 하고. 하루에 두세시간은 내 시간이 생기더라고요.
반대로 이 일을 할 때 '엄마라서' 가질 수 있는 장점은 없을까요?
없어요.
없군요. 마지막으로 워킹맘을 꿈꾸는 엄마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찾아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한마디만 더요.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밖에 안된다. 이건 진리예요!
* 본 인터뷰는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권고에 따라 비대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3화 예고 : 유아영어 파견강사 W를 만나다 (2월 12일 발행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