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살, 유치원을 그만두다(2)

본의 아니게 홈스쿨링

by 날필

반년동안 우리의 커리큘럼은 대략 아래의 활동들을 날씨와 상황에 맞춰 조합해가며 유동적으로 운영되었다.


강변산책로 달리기

유치원을 그만둔 다음날 아이를 데리고 강변 산책로로 향했다. 마음껏 뛰어보라고 했다. 아이는 주춤주춤 내 주변만 맴돌 뿐 생각처럼 잘 뛰지 못했다. 금방 지쳐서 집에 가자고 졸라댔다. 뛰는 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뛰는 것'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이보다 내가 뛰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매일 꾸준히 뛰는 일은 하루에 활기를 불어넣어주었고, 아이에게 뒤쳐지지 않을 체력을 길러주었다. 문제는 아이가 나의 뛰는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궁리 끝에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나는 달려서 강변산책로를 왕복했다.


등산 + 물감놀이

아이가 목적이 있을 때 기꺼이 몸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아이에게 제안했다.

"하라야. 우리 산에 갈래? 산 정상에 가서 물감으로 그림 그리게 해줄게."

좀처럼 집에서 쓰지 못했던 '물감'을 협상카드로 꺼내들자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우리는 미술도구와 물, 간식을 챙겨들고 매일 산에 올랐다. '물감놀이'라는 목표가 있으니 아이는 오르막길도 거뜬하게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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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종이에 물감을 짜 데칼코마니를 하기도 하고, 굴러다니는 나무와 돌에 색칠을 하기도 했다. 물감놀이를 마치면 우리는 그 자리를 깨끗이 정돈한 뒤, 붓을 씻은 물을 그대로 다시 병에 담아 산을 내려왔다. 아이가 물감으로 칠한 나뭇가지와 돌까지 모두 챙겨내려와 집에 와서 버렸다. 자기가 머물렀던 자리를 처음 그대로 해놓고 가는 것, 문화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나는 아이가 높은 도덕성을 갖기를 원했다. 혹시나 아이가 실수를 하게 되어도 보험이 되어줄 수 있도록.


다도

공기가 좋은 날은 무조건 짐을 챙겨 산으로 나갔지만 불행히도 그 해 가을은 공기가 안 좋은 날이 훨씬 많았다. 집에서도 할 일은 많았다. 함께 집청소를 마친 뒤 우리는 종종 티타임을 가졌다. 물을 끓여서 다관에 부어주는 것 외에는 다도의 모든 절차를 아이가 집도했다. 머잖아 아이는 능숙하게 찻잎을 계량하고, 진득하게 찻잎이 우러나오기를 기다리고, 제법 절도있게 찻잔에 차를 따라줄 수 있을 정도로 조절력이 생겼다.








한글공부

일주일에 네 번은 '한글이 야호'를 시청했다. 아이는 일곱살 후반까지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글을 깨우쳐 정보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사물과 현상 속에 담긴 의미를 유추하는 것이 미취학기의 아이에게 더 필요한 활동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겨울을 지내고 나면 아이는 학교에 갈 것이었다. 입학 후, 환경의 급변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한글공부에 대한 부담까지 끌어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6개월 간 "1일 1한글이 야호 시청 후 1받아쓰기"를 꾸준히 해낸 아이는 웬만한 받침글자까지 모두 깨친 뒤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독서활동

도서관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은 도서관을 찾았다. 두시간 정도 도서관에 머물면서 아이가 가져오는 책들을 모두 읽어주었다. 도서관 2층 창가 쪽에 놓인 등받이 없는 긴 소파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였다. 아이는 주로 공룡과 생태에 관련된 책을 좋아했고 나는 그림책에 관심이 많아서 우리는 서로 고른 책들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이가 같은 카테고리의 책만 보는 것에 대해서 나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다. 아이의 것을 함께 보면서 종종 나의 것도 함께 보기를 청했다. 공룡책 말고도 재미있는 게 많다는 걸 알게 된 아이는 나중에는 스스로 그림책 코너에 가서 기웃댔다.

아이가 참 종아했던 그림책 <수박수영장>

때로는 책에서 마음에 드는 장면을 함께 그려보기도 했다. 생각보다 많이 뿌듯해하는 아이를 보면서 그동안은 아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알 시간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영화감상

금요일은 노는 날.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기로 정했다. 주로 팝콘을 한 양푼 튀겨놓고 둘이 앉아 영화를 봤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라따뚜이>와 <겨울왕국>.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면 각자의 감상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생각보다 스토리에 대한 아이의 이해도와 몰입도가 높아서 내심 놀란 적이 많았다.


가령 아무런 설명 없이 갑자기 '평론가의 어린 시절' 회상으로 넘어가는 라따뚜이의 한 장면에서 잠시 어리둥절하던 아이는 그것이 '회상'이라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평론가가 래미의 라따뚜이를 먹고 왜 그렇게 기뻐했는지를 넌지시 물었더니 아이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 할아버지 어릴 때 엄마가 해준 거랑 똑같은 맛의 라따뚜이를 래미가 해줬으니까!"


겨울왕국을 보고 나서는 아들의 이상형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넌 나중에 안나랑 결혼하고 싶어? 엘사랑 결혼하고 싶어?"

"엘사."

"왜?"

"생각이 깊으니까."

"그치만 안나는 발랄하고 씩씩하잖아. 장난도 좋아할 것 같은데?"

"음...안나가 장난칠 땐 잘 맞겠네. 근데 엄마, 우리나라엔 안나도 엘사도 없잖아."

"엘사같은 친구 찾아보면 되지. 여자친구들 중에 누가 제일 엘사같아?"

"음...예서?"


아이도 금요일을 좋아했을 테지만 아이 못지 않게 나도 비생산적인 금요일이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은 마음이 몽글몽글해져서 우리는 평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사실은 모든 요일이 좋았다.

유치원을 그만두길 잘했다고 매일 매순간 생각했다.

그런 날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새 180일이 지나갔다.

입학식이 코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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