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줌이 마려운 건 잘못이 아니야
초등학교 입학까지 얼마 남지 않은 늦가을의 어느 날, 유치원을 그만두고 집에 있은지 한달쯤 됐을 때였다. 하루에 서른 번, 아니 쉰 번은 족히 되게 아이가 화장실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어느날부턴가 소변 보는 횟수가 잦아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증상이 가속화되었다
처음엔 부아가 났다. 그도 그럴것이 방금 화장실을 다녀온 녀석이 1분도 안 되어 다시 화장실을 가야 한다고 하질 않나, 막상 가서는 찔끔 한 방울 나올까말까 한 오줌을 짜내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밖에 나와서도 5분마다 (나름 밖이라고 참은 게 5분) 화장실을 찾아대면 분통이 터졌다. 차량으로 이동 중일 때의 곤혹스러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달래보기도 하고 설득도 해보고 화도 내고 윽박질러보기도 했다.
"하라야, 너는 지금 오줌이 안 마려워. 금방 쌌잖아."
"니가 마렵다고 느끼는 것 뿐이야. 막상 싸러 가면 한방울밖에 안 나오잖아. 조금 참아보면 어때."
"아니 도대체 화장실을 몇 번을 가는거야?"
"지금 차 세울 데가 없잖아! 참아!"
짜증이 목 끝까지 차올라 기어이 입 밖으로 나왔을 때에야 나는 그 단어를 떠올렸다.
빈뇨증. 내 아이가 혹시 빈뇨증인가?
도대체 왜? 유치원을 그만둔 뒤 우리의 일과는 이랬다. 아홉시 경 동생이 유치원에 가고 나면 강변으로 산책을 간다. 집에 돌아와서는 함께 집청소를 해놓고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서 돌아오면 점심을 먹고 산에 가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가끔은 산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뭐가 문제인가. 나는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엄마들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놓고 커피잔을 기울이는 시간에 나는 모든 관심을 아이에게로 기울이고 있는데. 뭐가 부족해서 이젠 또 빈뇨증이란 말인가. 아이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나는 화가 났다. 내 노력이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화를 내면 낼수록 아이는 눈치를 보며 더 자주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집에서는 애써 모른 척 하며 화를 눌렀지만 부득이하게 외출을 해야 할 때마다 나는 화를 감추는 일에 실패했다. 시도때도 없이 화장실을 찾아대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견디지 못하는 나 때문에 외출이 엉망이 된 후로 우리는 주로 집에서 머물렀다.
부득이하게 외출을 감행했던 어느 주말이었다. 이미 아이의 요구로 차를 세 번쯤 세웠고, 네번째로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이는 다시 요의를 느꼈다. 아이가 얼마나 어렵게 말을 꺼냈을지,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는지 다 아는데, 한숨이 나왔다. 화를 참으며 대답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아이아빠가 말없이 차를 세웠다. 뒷좌석의 아이를 일으킨 뒤 마시던 물병을 비워 거기에 소변을 보게 했다.
"하라야. 오줌이 마려운 건 잘못이 아니야. 사람은 당연히 오줌이 마려워. 오줌이 자주 마려울 때도 있고 가끔 마려울 때도 있어. 오줌이 마려우면 바로바로 말해도 돼, 아빠가 어떻게든 도와줄게."
오줌이 마려운 게 아이의 잘못은 아니다. 맞다. 짜증을 내고도 개운치 않았던 건 그래서였다. 아이의 잘못이 아닌데 아이에게 짜증을 냈으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그 불편한 마음을 다시 짜증으로 푸는, 나는 못난 엄마였다. 한방울짜리 오줌은 참았다 눠도 된다고 혼자 단정짓고 아이에게 참을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정작 어른인 나는 잠깐의 짜증도 못 참으면서 아이에게는 몸의 증상을 참으라니, 이 얼마나 가혹한 요구인가. 몸의 증상으로 괴로운 아이에게 마음의 짐만큼은 덜어주고 싶었다. 아이아빠의 말을 머리에 새겼다.
1. 오줌이 마려운 건 잘못이 아니야.
2. 오줌이 자주 마려울 때도 있어.
3. 오줌이 마려우면 언제든 말해도 돼.
아이가 쭈뼛거리며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이 세 문장을 반복했다. 자꾸만 반복해서 말하니 어느새 이 말들은 나의 진심이 되었고 나는 더 이상 짜증이 나지 않았다. 뭔가를 마음먹을 때 소리내서 계속 말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는 걸 새삼 알았다. 아이에게 반복해서 해준 말들이 결국 내 마음을 고쳐먹게 했다.
아이아빠도 약속을 지켰다. 외출시에는 늘 화장실 위치부터 체크했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았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늘 가방에 빈 병을 가지고 다녔다. 정말로 아이아빠는 단 한번도 "지금은 좀 곤란한데 참아봐."라든지, "아까 눴는데 또 마렵다고?"라든지, "다 큰 녀석이 물통에 쉬를 하고 이게 뭐냐"라는 등의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오줌 마려워? 그럼 가야지." 아이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이 어찌나 믿음직스럽던지. 단단한 아빠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 또한 전보다 훨씬 편안해보였다.
그럼에도 증상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오분이 멀다하고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막상 변기 앞에선 오줌도 뭣도 아닌 것을 쨀끔거렸다. 학교입학이 하루 이틀 다가올수록 마음이 초조해졌지만 우리는 애써 내색하지도, 입 밖으로 내놓지도 않았다. 이미 각자 할 일을 알고 모두가 노력하고 있었기에 답도 없는 괜한 푸념으로 서로의 마음을 어둡게 할 필요가 없었다.
입학이 코 앞으로 다가온 2월의 어느 날, 우리는 갑자기 깨달았다. 아이가 화장실에 가는 횟수가 확 줄어들어 있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각기 다른 시기에 인지했지만 서로 말하지 않았다. 좋은 일을 소리내서 말하는 순간 자칫 그것이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 아이를 키우면서 그런 감정을 많이 느껴봤기 때문이다. 아이아빠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던지 우리는 그저 조심스럽게 아이를 지켜봤다.
입학식 전날, 학교에서 받아온 학생기초조사서의 건강상태 란에 나는 ADHD증상과 함께 빈뇨증상을 적었다. 4개월 정도 지속되었지만 많이 호전되었으며 지금은 거의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혹시 새로운 환경에서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일시적으로 증상이 발현할 수 있으니 이해 부탁드린다는 말과 함께. 우려와는 달리 학교 입학 이후에도 빈뇨증상은 재발하지 않았다.
내 아이에겐 아무 고민도 없어야 한다고, 마음의 병이 생길 리 없다고, 나는 아이의 빈뇨증상이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라는 것을 내내 부정했다. 온종일 산으로, 들로, 강으로 다니며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으니까. 허나 종일 나와 함께 있는 아이 앞에서 나는 몇 번이나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가.
"학교는 유치원처럼 도중에 그만 다닐 수도 없어."
"이제 곧 학교가야 하는데...."
"학교에서는...."
"학교 가려면...."
이런 말들이 얼마나 아이의 마음을 옥죄었을까? 학교 입학을 앞두고 날로 커져가던 내 불안감은 아이에게 그대로 옮겨갔다. 마음의 불안을 쏟아내는 방법을 모르니 아이는 대신 오줌을 쨀끔거렸을 게다.
오줌이 마려운 건 네 잘못이 아니야.
오줌이 자주 마려울 때도 있어.
오줌이 마려우면 언제든 말해도 돼. 엄마가 도와줄게.
학교가 무서운 건 네 잘못이 아니야.
학교가는 게 정말 싫을 때도 있어.
학교가 무서우면 언제든 말해도 돼. 엄마가 도와줄게.
어쩌면 아이에게는 위의 세 문장이 아래의 세 문장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문제도 답도 아이가 아닌 내게 있다는 사실, 그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나를 깎아내는 일이 아이를 키우는 일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