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찬란했던, 그리고 가장 비극적이었던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어떤 이는 별을 바라본다.”
—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는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였다고 하죠.
누구보다 솔직하게, 끝까지 자기답게 살았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오스카 와일드의 인생 이야기를 들여다볼게요.
뭐 하나 평범한 게 없던 그의 삶이기에,
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이 되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오스카 와일드는 1854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시인이자 정치운동가였고,
아버지는 저명한 안과의사이자 고고학자였죠.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지성’의 언어에 둘러싸여 자랐던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철학을 익히며
고전미학에 깊이 빠져듭니다.
일찌감치 자신을 “아름다움의 사제(Priest of Aestheticism)”로 여기며,
삶 그 자체를 하나의 예술로 만들고자 했죠.
내 삶에 대해 알고 싶은가?
나는 내 천재성을 삶에 투영했으며,
내 글에는 내 재능을 투영했을 뿐이다.
와일드는 희곡, 소설, 동화, 비평 등 장르를 넘나들며
그 만의 스타일로 독창적인 작품들을 다수 남겼습니다.
특히, 1890년 7월에 발표된 오스카와일드의 유일한 장편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과 도덕성의 붕괴를 다룬 퇴폐주의 소설입니다.
(한국어 번역본은 1990년 10월 출간)
“Nowadays people know
the price of everything and the value of nothing.”
“요즘 사람들은 모든 것의 '가격'은 알지만,
어떤 것도 '가치'는 모른다.”
늙지 않는 초상화를 가진 젊은이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대신, 영혼을 잃어가죠.
이 소설이 나왔을 때는 “도덕에 어긋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지금 보면 정말 현대적인 주제 입니다.
외모, 욕망, 자기 이미지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는 귀족 청년 로드 알프레드 더글라스와 깊은 관계를 맺었고,
더글라스의 아버지는 그를 “소도미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는 중범죄였고,
와일드는 감옥에 수감되는 처지를 피할 수 없었으니까요.
1895년부터 2년간 레딩 감옥에서 복역했고,
그곳에서 그는 뼈아픈 편지,
『심연으로부터(De Profundis)』를 씁니다.
사랑에 대한 고백이자 자기 삶에 대한 반성이 담긴 아주 절절한 글이에요.
출소 이후, 그는 영국을 떠나 파리로 갑니다.
그리고 건강이 악화되어
1900년 11월,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46세였습니다.
그의 '말'들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죠.
“젊을 때는 인생에서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나이가 들고 보니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알겠다.”
“경험이란 누구나 실수에 붙이는 이름이다.”
“살아간다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한다, 그게 전부다.”
“문학과 언론의 차이는 언론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것이고, 문학은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중은 무엇이나 알고 싶어 하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문학과 연극을 구분해주는 유일한 기준은 공연 입장권일 뿐이다."
"나 자신의 일은 항상 스스로에게 죽도록 지겨운 것이어서, 남의 일을 더 선호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말년의 비극 때문에 ‘추락한 예술가’로 불리지만,
오히려 끝까지 진실했던 사람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정체성, 예술관, 세계에 대한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선택은 그의 삶을 불태웠지만,
동시에 영원한 문장으로 남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자주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나답게 살고 있는가?”
누군가의 시선, 사회의 기대, 안전한 길을 따르다 보면
자꾸 나 자신을 잃게 되잖아요.
와일드는 그런 세상에 맞서고,
비록 부서졌지만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의 마지막 말을 적어보며,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Be yourself; everyone else is already taken.”
“너 자신이 되어라. 다른 사람은 이미 다 차지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