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말 중국발 바이러스 사태가 터지고 연일 우한시 뉴스가 앞다퉈 올라올 당시까지만 해도 막연한 안타까움이 있었을 뿐 말 그대로 남의 나라 걱정에 불과했다
계절이 지나는데도 극성을 부리고 있는 이 문제가 내 생활에 영향을 끼친 것은 2월에 참가 예정이었던 홍콩 마라톤의 취소부터였다
본격 마라톤 시즌이 시작되기 전 장거리 연습 겸 다양한 대회를 선택, 알차게 계획을 세웠건만 홍콩 마라톤을 시작으로 줄줄이 취소 안내 메일이 들어왔다
그래 사람이 살고 봐야지 그깟 대회가 뭐라고
속은 쓰리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실망스러운 마음을 달랬다
다음 계획은 홍콩 마라톤에 이어 바로 참가할 예정이었던 오키나와 마라톤
이 즈음해서 한동안 떠들썩했던 크루즈선 집단감염 사건이 터졌다
일본 요코하마에 정박되어 있는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선 안에서 집단감염이 일어났는데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갇혀있는 사이 감염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는 희대의 이해 못할 사태에 더해 이 배의 승객들이 오키나와를 거치면서 잠시 배에서 내려 시내 관광을 즐겼다는 난감한 소식도 덤으로 들려왔다
가야 하나 포기해야 하나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갈팡질팡 흔들리는데 친절하게 집으로 대회 안내 우편물이 배달됐다
하지만
'아.. 너무 미안한데 난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아ㅜ'
이때만 해도 국내 확진자가 그리 많지 않았던 때였고
솔직히 감염보다도 감염의 뒤를 따르는 동선 공개의 꼬리표가 더 무섭다는 바보 같은 생각이 컸는데 그럴 만도 한 것이 "오키나와의 마라톤에 다녀와서 감염 확진을 받았습니다"라고 했다간 이 시국에 굳이 그시국네 대회에 나가 감염까지 당하고 돌아와 난생처음 포털 검색어 1위에 오르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겁을 먹었었다
코로나도 무섭지만 상상 속의 이 상황도 못지않게 무서워서
대회 참가비 8000엔을 날리고 이 대회는 스스로 접었다
다음 대회는 국내의 '고구려 마라톤'
마라톤 비시즌이 끝날 무렵 봄을 알리는 이름 있는 대회라고 했다
보통 동마를 준비하면서 점검차 참가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고 나 역시 그런 뜻으로 대회 참가신청을 했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2월 중의 대회이고 아마도 이 대회의 나는 후미의 후미로 처져 외롭게 달리다 가까스로 완주를 하게 될 확률이 높지만 이제와 그런 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아기꺼이 신청을 했다
패기 있게 결제를 하고 기다렸지만 이 대회라고 이 사태를 빗겨나갈 수는 없었다
대회 강행과 취소 사이 많은 고민이 있었던 것 같지만 결국 이 대회도 취소됐다
그리고 아직 대회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지만 이번 바이러스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경북의 '경주 벚꽃 마라톤'도 일찌감치 취소되고 말았다
꽃길 아래의 행복한 달리기를 꿈꿨지만 뭐 올해만 살 것도 아니니 내년에 건강히 다시 만나요ㅜㅜ
좋은 연습이 될 것 같아 모두 참가해 완주를 결심했지만 바이러스 앞에 내 계획은 꺾이고 말았다
겨울 내내 열심히 달리고 몸을 만들어 처음 대회에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던 동아마라톤에서 좋은 결과를 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2년간 10km를 달렸었고 올해 처음으로 풀 마라톤에 나가게 되어 기대도 컸고 그사이 내가 얼마나 이 거리를 달리는 것에 적응하고 능력치를 담게 됐는지 스스로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기다리던 동마도 이번 사태로 일찍 문을 닫고 마는데
동마에 낙담할 틈도 없이 서울 하프마라톤도 곧이어 취소와 환불 공지를 띄웠으며 이렇게 내가 계획한 봄의 마라톤 대회들은 모두 올해의 문을 닫고 말았다
우리만의 사태가 아니다 보니 이웃나라는 올림픽 취소의 기로에서 간당간당 위태로운 언론플레이 중이고 그들의 큰 행사인 도쿄 마라톤도 선수급만 출전해 간소화된 상태로 모양새만 갖춰 간신히 치뤄졌다고 하지 않는가
실은 도쿄 마라톤 참가 추첨에서 떨어졌다
낙담도 잠시
같은 날 발표가 있었던 나고야 우먼스 마라톤에 당첨되어 기쁨에 환호하며 도쿄 낙첨의 아쉬움을 달랬는데 이 대회도 역시 보란 듯 취소되고 말았다
취소된 것도 슬프지만 이 대회는 참가비 환불도 안된다고 해 마음을 두 번 찢었다
<환불은 못해줘 쏘리. 대신 기념으로 메달은 보내줄게>
메달?
갑자기 정신이 확 맑아진다
이 대회 신청은 순수한 달리기 외에 물욕이 작용한 결과로 완주메달의 제작사가 무려 우리가 아는 그 티파니다
뭐 달리기를 하다 보면 메달이 탐날 수도 있는 거지
정말 열심히 뛰어 꼭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말겠다는 의욕에 불타올랐던 평화롭던 과거가 그립다
이렇게 참가 신청된 대부분의 대회가 취소된 가운데 유예라는 형식으로 살아남은 대회가 있다
인천 국제 하프마라톤대회
날짜를 뒤로 넘겨 초여름의 대회가 됐다
작년 이 시기에 강변마라톤에 나가 지옥을 경험했었는데 (풀 마라톤 2회 차였음) 벌써 한 바퀴를 돌아 새 계획을 앞두게 됐다니 새삼 감회가 새롭다
인천 하프도 동마와 마찬가지로 2년간 10km를 뛰었고 올해 첫 하프를 앞두고 있으며 일단 취소되지 않았다는 기대에 이 난리 난 상황이 빨리 종식되기를 열렬히 바랄뿐이다
그리고 취소도 연기도 아직 없는 소중한 대회가 하나 더 있다
제주 국제 관광 마라톤축제
내 인생 첫 풀코스를 여기서 뛰었다
그리고 올해도 같은 대회의 같은 코스에 도전한다
이 대회가 예정대로 열릴지 취소될지 지금으로선 잘 모르겠지만작년의 이 대회는 정말 즐거웠다
첫 장거리 달리기의 정신적 충격은 대단했지만 어찌 됐든 완주를 했고 성취감이 작지도 않았다
지역 분들이 일찍부터 나와서 불 때고 솥걸어 끓여준 전복죽은 제주의 그 어떤 맛집의 식사보다 더 꿀맛이었고 올해도 꼭 다시 먹고 싶은마음이다
그리고 바이러스 사태가 이렇게 오래 갈거라 생각 못하고 결제한 또 하나의 대회
다낭 마라톤
8월에 열릴 이 대회까지 해외 이동이 가능할 만큼 사태가 진정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달리기가 꼭 대회를 나가야 가능한 운동은 아니지만 체력이 되고 장거리를 뛸 수 있을 동안 여러 대회를 다녀보고 싶었다
작년의 경험을 딛고 올해는 좀 더 잘 뛰어보고 싶은 생각으로이번 봄의 여러 마라톤 여행 계획을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취소의 연속에 서있게 됐다
(올해의 목표는 4시간 45분으로 정했고 내겐 충분히 도전에 가까운 스릴 넘치는 기록이다)
평소 운동을 다니던 피트니스센터는 기한 없는 폐쇄 중이고 대회가 연달아 취소되면서 기분이 시들해져 한동안 달리기를 소홀히 했다
날이 풀려 오랜만에 동네 공원으로 달리기를 하러 갔다가 정말 놀란 것이 대회에서나 볼법한 풀장착의 러너들이 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회를 나가지 못하는 아쉬움은 나만의 기분이 아닌가 보다
설렁설렁 조깅이나 하던 나와 달리 그분들은 겨울에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듯 탄탄한 다리로 쭉쭉 뛰어 곧 시야에서 사라지기 일쑤였다
자극은 받았지만 반성이 짧은 나는 아직도 운동이 제자리다
그사이 새 운동화를 장만했고 줄넘기도 샀다
지하주차장에서 12층 우리 집까지 계단 오르기 운동도 하고 있다
그래도 쉰 기간이 길어서인지 아직 몸이 무겁다
어느 시점에서 어느 대회부터 참가가 가능할지 알 수 없지만 이 글을 계기로 다시 마음 다잡고 달리기를 시작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