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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8. 2022

1. 하루키를 떠올리는 저녁

세상이 아무도 모르게 비밀을 품는 저녁입니다. 세상은 침묵하기 시작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섭니다. 이렇게 몇 번의 저녁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어느새 따뜻한 봄과 만나게 되겠지요. 폭죽이 터지듯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뾰족뾰족 얼굴을 내미는 어린 생명들과 만나는 건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입니다.     

언젠가 꽃은 바람이 쓰다듬는 손길로 크는 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어디에서 처음 시작했을까 생각하다가 먼 곳에 있는 사막을 건너고 남극을 지나 온 바람이겠구나 하는 것에 생각이 닿자 그 바람은 조금 더 특별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내 볼을 스친 바람도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으면 사막이나 남극의 이야기를 전해줄지도 모르지요.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턱없이 미신이라 여겼던 그대와 나의 전생을 떠올린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당신과 나의 전생은 어떤 인연으로 맺어졌을까요.     

오늘은 저녁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카페 구석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몇 권의 소설을 읽어야 봄을 맞을 수 있는 일종의 의식처럼 말이죠. 몇 개의 소설을 묶은 그의 단편집 가운데 눈에 띠는 것은 카프카의 <변신>에 등장하는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를 소재로 한 소설이었습니다.     

카프카는 인간이 벌레로 변하는 이야기를 썼지만 하루키는 벌레가 되어 방안에 갇혔던 주인공이 다시 인간으로 변해 열쇠 수리공인 젊은 곱추 아가씨와 만나는 장면을 그려놓습니다. 벌레에서 인간이 된 그레고리 잠자가 만나는 세상은 모든 것이 낯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다못해 벌레처럼 ‘여러 개의 팔을 갖지도 못하고 편안하게 한 곳에 머물 수 있는 해바라기도 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대목에서는 잠시 벌레나 식물보다도 자기방어를 갖추지 못한 나약한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하루키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존재라고 믿는 인간의 착각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요.     

굶주린 잠자가 방에서 나온 뒤 자신을 가뒀던 가족들을 떠올리고 장애를 가진 여성과 처음 만나 자신도 모르게 성욕을 느끼는 일련의 일들은 우리가 무심히 지나가는 가족이나 인간의 본능에 대해서도 낯선 시선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다 읽은 후 한참을 곱씹어 본 뒤에야 지독한 여운을 남기는 건 하루키만이 가진 특별함이 아닐까요.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우울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혼자가 되고 싶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자주 찾게 되는 곳은 가까운 대학 캠퍼스입니다. 스스로 빛나는 젊음을 발산하느라 타인에게 미처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곳,  땅에 닿자마자 탄력 있게 튀어 오르는 공처럼 젊음이 가득한 그곳은 사람을 참 편하게 하거든요.     

문득, 오래 전 비누 향 가득했을 당신의 젊은 날이 궁금해집니다. 언제나 가까이 있었는데 나는 왜 당신의 젊음을 훔쳐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오늘 하루키의 소설에서 새롭게 알게 된 ‘헤싱헤싱하다’라는 형용사처럼 따뜻한 겨울 햇살 한 자락이 내 마음을 헤싱헤싱하게 흔들고 가는 저녁, 그대의 비누 향 나는 젊음과 마주앉아 오래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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