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텔레비전 프로에서는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가면을 쓰고 노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동안 목소리로만 그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그 사람의 얼굴이나 사회적 지위가 주는 후광 대신 오로지 현재의 목소리와 실력으로만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정작 가면을 벗고 난 후 혼란스러운 건 시청자입니다. “저런 면이 있었어?” 라든가 아니면 “보기보다 실력이 굉장한데?” 하는 감탄사를 내뱉는 것은 가면의 겉과 속이 다른데서 오는 괴리감이지만 그것은 시청자가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창작에서도 때때로 이런 방법이 도입되곤 합니다. 새롭고 좋은 작품을 선정하기 위해 이름을 가린 채 오로지 작품으로만 평가하는 것입니다. 작품이 그다지 좋지 않아도 명성을 가진 작가라면 당연히 좋은 작품일거라고 생각하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때로 눈감아 주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우리는 누구나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내가 자청해서 쓰는 가면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사회적인 학습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가면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벌이나 스펙이 나를 평가할 수도 있고, 회사에서의 직함이나 사회적 지위가 나대신 나를 평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내가 기본적으로 장난이 많고 농담을 잘 하는 사람이라 해도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그런 면들은 쉽게 꺼내 보이기가 어려워집니다.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작 본래의 모습은 꼭꼭 숨겨두었다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드러나거나 은밀한 부분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사회적 가면은 심리학 용어로 ‘페르소나’라고 부릅니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에 따르면 페르소나는 그림자와 같으며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자 자아의 어두운 면입니다. 두꺼운 가면을 쓰고 살아가므로 그들의 진면목을 평가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가면 속을 엿보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세상의 여리고 약한 생명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는 내면을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만일 그 사람이 힘없고 여린 아이, 여성, 장애인을 대할 때나 말하지 못하는 동물이나 식물을 대할 때 함부로 한다면 그 사람은 비록 온순한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해도 내면은 포악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가 여리고 약한 생명들에게 따뜻하게 대한다면 그 사람은 내면이 따뜻한 사람이라 믿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또 그 사람이 여린 생명에게는 한없이 여리지만 강하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강하다면 그 사람은 분명 정의에 불타는 의로운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가면을 쉽게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가면 속 모습을 조금이라도 엿보고 싶다면 그 사람이 가까이 있는 대상을 대하는 행동을 한번쯤 눈여겨보는 건 어떨까요. 그러나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리고 약한 생명들을 따뜻하게 대하면서 여린 것들에게는 한없이 여리고 강한 것들에게는 한없이 강한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