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발명한 것 가운데 가장 혁명에 가까운 것은 ‘세탁기’라고 합니다. 세탁기가 발명되기 전 여성들은 빨래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으니까요. 세탁기가 발명되고 난 후부터 여성들은 드디어 지긋지긋한 빨래의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사람의 힘이 없어도 자동으로 빨래를 해주는 세탁기야 말로 여성해방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겠지요.
반면, 인류가 발명한 것 가운데 가장 최악의 발명품으로 꼽히는 것은 바로 ‘냉장고’라고 합니다. 음식물을 신선하게 오래 보관해주고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냉장고가 왜 최악의 발명품으로 꼽혔을까요.
냉장고가 발명되기 전 사람들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만큼의 음식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좋든 싫든 이웃과 나눠먹는 것이 의례적이었지요. 너무 많은 음식물이 있어도 보관할 방법이 없으니 이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냉장고가 발명된 후부터 사람들은 지금 당장 음식물을 먹지 않더라도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두기 시작했고 차츰 이웃과 나눈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못 먹으면 내일 먹어도 되고, 냉동을 시켜놓으면 열흘, 아니 그 이상도 보관이 가능했으니까요.
요즘은 각 가정마다 냉장고를 뒤져보면 썩어가는 음식물 한두 개 정도는 꼭 있게 마련입니다. 당장 먹지 않는 채소와 과일·고기 등을 보관할 대로 보관하다가 결국은 쓰레기통에 버려지곤 하지요. 버릴 때는 “진작 먹을 걸” “아까워라” 하면서 버리지만 막상 새로운 음식물이 들어오면 또 다시 냉장고에 넣어두고 같은 일을 되풀이하기 일쑤입니다. 아마도 인류에게 냉장고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는 더 많은 음식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지 않았을까요?
제가 비전동 롯데캐슬아파트에 살 때의 일입니다. 그날도 출근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는데 현관 문 앞에 놓인 커다란 종이박스가 놓여있고 싱싱한 상추가 하나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박스 위에 붙인 종이에는 이런 글귀도 쓰여 있더군요. <제가 직접 노지에서 키운 상추입니다. 필요하신 만큼 가져가세요!>
전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사진 한 컷 찍고 출근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참 따뜻한 사람이 우리 아파트에 살고 있구나 하면서요. 저녁에 돌아갈 땐 아무것도 없었으니 아마도 주민들이 너도나도 조금씩 가져갔겠지요. 얼마 뒤에는 노란 참외가 또 그 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땐 나도 참외 하나를 가방에 넣어 와 사무실에서 맛있게 먹었지요.
그 이후에도 이런 일은 몇 차례 반복됐고 어느 순간부터는 엘리베이터만 타면 그분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곤 했습니다. 아직까지 그분을 만나진 못했지만 이름도 모르는 맘씨 좋은 분이 가져다 놓은 상추·참외 이런 것들을 조금씩 가져가며 아파트 주민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행복해져서 미소가 저절로 지어집니다. 아마도 그분이 몸소 보여주신 조건 없는 ‘나눔’이 갖는 긍정의 힘 때문이겠지요.
이 봄엔 당신에게도, 내게도 이런 조건 없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