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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민 Oct 21. 2020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다

[씨-멘트] 송강호의 마음가짐

100미터 달리기처럼 몇 초안에 이뤄지는 직업이 아니다.
(배우 송강호, 2015년 9월 인터뷰 중)


퇴사를 하고 다음 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모 회사에서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평소 관심이 있던 분야이기도 했고, 업계에서 평판이 좋은 리더가 있고, 왠지 잘하면 더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좀 들떴다. 아직 새로운 업을 시작하기 직전이라 괜히 수습하거나 포기해야 하는 일들이 없으니 그야말로 최적의 타이밍이라 생각됐다. 최대한 빨리 미팅을 진행하고, 수락 의사를 전했다. 긍정적 반응을 내비쳤던 그날 만남 이후, 이미 나는 출근 일자를 머리로 정해보며 해당 업무에 대한 조사와 준비를 차곡차곡해나갔다.


문제는 그들의 결정이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벌어졌다. 당초 '혹시 괜찮으면 부탁드린다'며 내놓았던 제안을 그들 스스로 거둬들이고 번복한 것. 그러한 답변을 예정보다 긴 시간에 걸쳐 기다렸다고 생각하니 그저 허탈했다. 그들은 수정된 형태의 제안을 또 건넸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그런 찔러보는 식의 책임도 지지 못할 제안을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회사 상황과 업무 방향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조직을 상대하며, 애정 어린 에너지를 쏟아내기엔 내 시간이 너무도 아깝다. 해당 회사를 향한 마음은 이미 저물었다.


'디졸브 이직'이 아닌, '일단 퇴사'를 결정한 적이 이번을 포함해 몇 차례 있다. 다음 업은 회사를 그만두고 차분하게 준비하자는 마음에서였다. 퇴사 초반에는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왠지 모든 걸 다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돋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눈 앞에 보이는 성과나 결과물이 없으면 초조해진다. 정규직을 떠나 가장 힘든 순간은 사라진 월급날을 인지하고 마주하는 때다. 통장 잔고가 서서히 줄면 조급하다. 조급해지면 일을 그르치기 딱 좋다. 흐려진 판단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고, 무작정 덥석 물어버리기 때문이다.


"일희일비하지 말라." 10여 년을 기자로 일을 하면서 많이 듣고, 또 많이 뱉었던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업계 특성상 일이 어디로 튈지 모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많고, 그 계기로 인해 많은 것들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것을 많이 보았다. 문채원 배우와의 인터뷰에서도 "좋은 건 좋은 대로 나쁜 건 나쁜대로, 크게 느끼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했던 적이 있다.


영화 <사도> 스틸


영화 <사도> 개봉을 앞두고 송강호 배우를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이미 <괴물>(2006), <변호인>(2013) 등으로 천만 관객을 두 차례 달성했던 터라 스코어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그는 덤덤했다. "흥행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100미터 달리기처럼 몇 초안에 이뤄지는 직업이 아니다."


퇴사를 하고 다음의 일까지 공백기에 서있는 지금의 나 같은 사람, 혹은 지금 자신이 처한 일이 뭐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니 잠시 주춤한다고 해서 답답해하거나 슬퍼하지 말라고. 아직 우리 앞에는 무한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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