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은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일

리뷰-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by roads

얼마 전 하루 간격으로 안타까운 죽음 소식을 들었다.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가 투신 사망하였다. 다음 날 다른 곳에서 다른 발달장애인이 약을 과다복용하고 생을 마감했다.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장애와 가난이 엮는 비극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들 죽음은 한국 사회의 장애인 위치를 알려준다. 그런데 나는 이들과 어떻게 손을 잡고 있는가.


그들이 거리에서 온몸으로 거리의 바닥에 엎드려 시위를 할 때, 그들이 계단을 오르내려가는 시위, 휠체어를 타고 승차하는 시위를 보면서, 그들의 이동 고충을 알았다. 그러면서 장애인등급제 폐지, 이동권 보장, 장애인독립생활지원 등의 요구를 응원 했다.


난 그렇게 장애인 인권운동에 박수를 보내지만, 장애인을 우연히 마주쳤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복잡해진다. 그들의 ‘다름’이 나를 자극한다. 그것은 ‘낯설다’와는 다른 감정이다. 일그러지는 얼굴, 알아듣기 힘든 발음, 비틀리는 걸음걸이 등 그들의 몸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른다. 연민과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감정이 올바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몰라서, 난처한 상황과 실수를 피하기 위해서 나는 얼른 자리를 떠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장애를 갖게 되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서서히 장애를 가진 삶을 영유하게 되는 것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래, 운좋게 난 비장애인으로 태어나고, 운좋게 그런 환경을 피해왔지만 나이라는 시간의 쌓임은 장애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의 시위가, 그들의 몸 움직임이 전혀 남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감정의 호들갑 밑에 있는 내 무의식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혹시 그들의 삶을 잘못된 것으로 낙인찍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하 <변론>)은 이런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 그리고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존중은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

<변론>은 ‘잘못된 삶(wrongful life)’ 소송 사건을 소개한다. 의사가 태아일 때 장애를 일으키는 유전자 검사를 잘못하여 장애인 자녀가 태어났으므로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한 사건이다. 의사의 부주의, 과실로 인해 자녀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변론>은 장애를 가진 삶이 잘못된 삶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잘못된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인가’, 잘못된 삶이 아니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한다.


저자 김원영은 잘못된 삶이란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격당한 삶'이라고 정의한다. 장애만이 아니라 다수가 혐오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은 잘못된 삶의 실체, 존중받지 못한 삶이 되기 쉽다. 존중은 개별자로서, 인격체로서 실존적 의미를 인정하는 것이다. 존중받지 못할 때는 한 사람의 장애인이지만, 존중을 받을 때는 장애를 가진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격체가 된다. 저자는 이러한 존중을 당사자 입장으로 가져와서, 주체적 적극적으로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장애를 정체성으로 수용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한다.


“나는 장애를 정체성으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선택이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과 역사를 내 자아의 중대한 부분으로 삼는다는 말이다.”(129) “자기 자신을 혐오나 피해의식에 기초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에 구축해놓은 외모의 위계질서에 종속되지 않으며, 앞으로의 삶을 외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혹은 피억압자로서의 의식과 트라우마에 짓눌리지 않은 채 살아가겠다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수용한 것이다.”(144)


저자가 말하는 정체성 수용은 물리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상태를 인정하는 것, 즉 체념이나 피해의식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에 대한 과도한 존중을 담거나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취하는 정신적 승리를 위한 마음가짐도 아니다. 온전히 자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장애의 현 상태를 인정하는 것과 그 장애로 인한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각자가 처한 불편하고 부당한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행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소수자, 자신의 정체성에 항상 주눅이 들어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정체성 수용의 태도와 자신을 연결하여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비주류 자유주의자라고 자평하는 나의 정체성의 인식은 어떤 무게와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가? 내 서사 형성에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 고민해본다. 나에게 정체성 수용이 주체적 독립적인 태도처럼 보이지만 고립적 태도가 아니었는지, 어떤 변화도 수용하지 않으면서, 그냥 그대로의 모습만을 인정해달라는 고집스런 태도가 아니었는지 말이다 .


존중은 아름다울 기회를 평등하게 갖는 일

저자는 존중의 또 다른 요소로 매력자원을 말한다. 진정으로 타인과 깊숙이 연결하는 요소는 매력,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아무런 매력도 보이지 못하는 사람은 도덕과 법규범에 의지해 일정한 존중을 받을 수 있지만, 진정으로 타인과 깊숙이 연결될 기회를 갖기는 어렵다.”(15)


그런데 그 매력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저자는 누구든 매력은 있고, 매력은 시간을 두고 찾는 것이며 서로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서로 매력을 느끼기 위해서는, 마치 화가들 앞에 자기 초상화를 맡기는 것과 같이 긴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름다울 기회를 평등하게 나누는 실천’이라고 부른다. 그 실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장애아동과 비 장애아동이 한 학교에서 오랜 시간 함께 하기, 어떤 중증의 장애인이라도 거리에 나오기 편한 환경 만들기, 이들이 자기 서사를 충분히 말할 수 있게 하고 그 말을 듣는 시간을 배정하기, TV 프로그램에서 구체적이고 섬세한 감정과 표정을 드러내는 장애인 캐릭터를 만날 기회를 제공하기, 공식적인 회합뿐만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가급적 모든 사람이 소외되지 않고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상호작용의 기술을 공유하고 의사소통 규범을 준수하기, 장애아의 부모, 형제자매, 연인, 친구, 이웃이 쓴 글을 진지하게 읽고 정치적 목소리에 힘을 싣기.”(284-5)


이러한 행동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비장애인 다수에게는 아주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소소한 일들을 장애인과 적극적으로 나누지 못하고 있다. 소소한 일상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나는 어떤가? 나도 정형화된 매력의 기준으로 사람을 보았다. 그 기준에서 먼 사람들과는 가깝게 느끼지 못했고 더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도 다수처럼 장애인 인권을 정치사회적 구조의 변화, 정치적 올바름 차원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답게 사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으로만 구성될 수 없다는 극히 단순하고 자명한 이치를 장애인 삶과는 연결시키지 못했다. 크든 작든 공동체의 온전한 구성원으로서 인정이 필요하다는 절실함을 간과했다. 나는 장애인 인권운동을 그저 좋은 풍경을 만드는 것처럼 타자화해 왔다.


누구에게는 소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누구에게는 벅찬 일이다. 욕심내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이 나이들면서 어려워진다. 그러면서 작은 것들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불편하지만 살아가는 길에 천천히 동행한다는 희망을 품는다. 그러면서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더 많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전보다 절실히 느낀다. 내가 공적 사적 영역에서 함께 하는 친구들이 필요한 것만큼 그들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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