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ing in Place
복받은 죽음
차가운 바람이 부니, 부고 소식이 많아진다. 동네 가까운 지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은 서울이다. 코로나로 인해서 조심스러운 마음에 조문을 갈 수 없었다. 조의를 간단히 문자로 표하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지인을 만났다. 어머니가 힘들게 소천하시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래도 복받은 어른이란 소릴 들었어. 많이 누워있기는 했지만, 자신이 사는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예전에 어른들은 집에서 잠자다가 눈을 감는 것을 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집에서 죽는 것만으로도 복이 되었다. 그만큼 집을 떠난 죽음이 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의 가족 경우만 봐도 죽음을 맞이하고, 장례를 치르는 장소가 많이 변했다. 집에서 돌아가시고 집에서 장례를 치렀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집에서 사망하고 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기어 조문객을 받은 적도 있다. 엄마는 요양원에서 돌아가셨다. 혼자 걸을 수 없고,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정도의 인지 장애로 인해서 엄마를 요양으로 옮겨야 했다. 나 혼자 엄마를 돌볼 수가 없었다. 그 사정이 무엇이든 지금도 죄송스런 마음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엄마를 요양원으로 옮기기 전에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엄마와 집과의 관계이다. 아무리 낡고 누추한 집이라도, 엄마의 땀과 감정, 경험이 스며들어 익숙했던 공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엄마의 삶이 뿌리내린 유일한 공간이란 점이었다. 집을 떠나면서, 인지적 장애가 있어도 그 뿌리가 뽑히는 단절감을 느끼셨을 것이다. 엄마에게 집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완전히 이질적인 외계 세상, 우주의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것이었음을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한다해도 엄마가 느끼는 그 감정을 닿을 수 없다.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는,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머니에 대한 글이 있다. 어머니가 병세가 심해지자, 솔닛은 어머니의 거처를 옮긴다. “어둡고 엉망이 된 집에서 어머니를 데리고 나온 일은, 사실은 익숙했던 일상과 사물의 배치로부터 습관의 힘으로 버틸 수 있던 그곳으로부터 당신을 떼어낸 셈이 되었다.” “어머니는 그곳이 임시거처나 호텔이 아니고, 잠시만 머물다 옛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게 아니라고 생각되자 자신의 물건들을 빼앗겼다고 여겼다. 어머니는 새로운 지도를 익히지 못했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어머니가 나온다. 그녀는 분리불안증이 있어서 끊임없이 결혼한 딸을 부른다. 그리고 응석을 부린다. 어머니와 동거하는 가족은 단지 고양이뿐이다. 어머니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딸은 ‘잠시 동안 요양원으로 가 있자’며 어머니를 설득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파트를 떠나면서, 항상 껴안고 지내던 자신의 반려묘을 쳐다보지도 않고,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것을 모두 놓아버리는, 이제는 돌아올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공허하면서 떨리는 눈빛으로 자신의 거처를 떠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딸은 고급 요양원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그곳을 나오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냄새’를 맡는다.
가족간병의 어려움
흔히들 ‘집에서 죽기’를 희망하지만, 최근 조사에 따르면 아주 극소수만이 집에서 사망하고 있다. 그리고 65세 이상 노인들이 사망하기 전 2-3년 동안 요양원, 요양병원 생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집이 있음에도, 집에서 죽음을 맞지 못하는 이유는 복잡하다.
고령사회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길고 느리게 일어난다. 서서히 자립능력을 상실되어 간다. 먹고, 배설하고, 청결하게 몸을 관리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이런 상태를 집에서 돌보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가족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 돌봄을 책임지는 가족의 일원은 일을 포기해야 하고, 가족의 삶이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재택간병서비스도 하루에 3-4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노인이 노인을 돌봐야 하는 상황도 많다. 간병을 하면서 간병인은 육체적 힘듬과 마음의 병을 앓게 된다. 종종 ‘간병살인’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시설 이용이 늘어난다. 노인들은 가족이 있건없건, 자신이 소유한 집이 있건없건. 점차로 집에서 떨어져 시설로 보내진다. 이를 결정하는 사람은 당사자가 아닌 가족이다. 당사자가 결정을 해도 가족에 피해를 끼치기 싫다는 배려 때문이다.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우에노 치즈코는 집에서 죽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 중 가장 큰 장애요인이 가족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돈이 많으면 그나마 노인의 최소한의 존엄이 보장되는 시설, 개인실요양원으로 보내질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부분 시설 공급자의 편의에 입각해서 돌봄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보내진다. 이런 시설들은 개개인으로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룹으로 돌본다. 입소하면서 대부분 누워서 생활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노인은 시민의 자격이 박탈이 된 상태로 살게 된다.
우에노 치즈코는, 사람들은 ‘누구나 혼자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결혼 경험의 유무가 아니라, 각 세대별로 다양한 이유로 혼자가 된다. 고령세대인 경우, 사별, 이혼, 자녀의 독립 등으로 혼자 사는 인구가 늘고 있다. 한국도 일본과 상황이 다르지 않다. 초고령화 사회를 눈 앞에 둔 한국은 고령자의 간병은 어떻게 할 것인가.
Aging in place
최근에 한 중년남자가 고독사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 분이 병원이나 요양원 등 시설에서 죽었다면 고독사로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 고독사의 근거는 집에서 홀로 죽었다는 것이다. 독거 자체를 마치 어두운 그림자처럼 취급하며,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문화에서 홀로 죽음을 맞는 것은 비극적인 최정점의 모습으로 비친다. 그런데 우에노 치즈코는 역으로 반문한다. “고독사라는 건 그 전부터 고독하게 살던 사람의 얘기다. 혼자 살아도 고독하지 않으면 고독사가 아니다. 고독사가 아니라 '집에서 홀로 맞는 죽음'이다.” 나아가 그녀는 집에서 홀로 맞는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지말고, 집에서 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죽음은 서서히 진행되는 과정이다. 음식을 못 먹게 되면서 기아상태가 되고 물도 못 마시게 되면서 탈수 상태가 되고 이윽고 호흡곤란이 오면서 하악호흡이 시작되고 끝내 숨을 거두게 된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이런 과정을 병으로 취급해 심폐소생술 등으로 죽는 자를 더 힘들게 한다고 우에노 치즈코는 말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죽음의 병원화’에 대해 반대한다. 주변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노인들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천천히 내려가는 과정에 있다. 그들 앞에 기다리는 건 죽음이다. 이런 과정이 어떻게 집에서 홀로 가능할까? 책에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집은 병원, 도로는 복도, 병원은 너스스테인션'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지역케어 시스템을 소개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 운동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늙고, 죽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Aging in place는 고령기에 접어들어 거동이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시설입소보다는 자신이 살던 장소에서 계속해서 늙어가면서 건강상태나 경제적 여건이 변화하더라도 자신이 살아왔던 지역공동체 내에서 지속적으로 거주하는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 지역공동체에서 서비스 연계가 필요하다. 간병, 간호, 의료가 연결되어 함께 하는 운동이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커뮤니티 케어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터부시해 왔다. 그래서 죽음은 항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하게 된다. 죽음도 삶의 일부분이다. 잘 살기 위해서 죽음도 준비해야 한다. 최근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죽음을 보면서 나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그런데 그것이 내 선택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내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은 어떻게 만들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