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언니들의 쌉쓰레한 기억

맛집 기행에서 빠진 맛

by roads

언니들의 소중한 기억을 지키자

중년 이상의 나이가 되면, 매일 건강이 기울어져 간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커다란 병이 아니더라고 몸과 정신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매일 실감한다. 우선 제일 큰 증상은 깜박깜박하는 것이다.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는데, 그 그림에 맞는 단어가 곧바로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 단어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일상어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더 괴롭다. 마치 머리 저 깊은 뒤에서 그 단어를 당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당김을 풀고 튀어나와도 다시 이빨 사이에서 뭉개진다.


이런 경험은 나만이 겪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깜빡깜빡 하는 증상이 심해지면서, 주변 언니들을 떠올렸다. 바로 경제공동체, ‘언니네텃밭’의 언니들이다. 언니들도 마찬가지로 나와 같은 증상을 겪고 있다. 언니네텃밭은 직접 언니들이 농사지은 농작물과 그것들을 재료로 만든 반찬을 매주 한번 소비자들에게 꾸러미 형식으로 택배를 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 내가 횡성으로 이주해 온 이후, 언니들의 토종씨앗 지키기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서 언니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언니들의 경험과 기억이 무척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니들이 귀한 기억들을 잊지 않고 살았으면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언니들이 요즘 글자를 접하는 기회는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를 보는 정도이다. 아마도 길어봤자 1분 이내 분량일 것이다. 핸드폰을 통해 뉴스거리나 흥미 있는 소식을 접근하는 것은 언니들에게는 낯설고, 시력도 따라주지 않는다. 그 흔한 유튜브도 익숙하지 않다. 정치유튜브는 젠더 편향이 심하다. 남성들이 주시청자이다. 문자 메시지에 대한 언니들의 답장은 짧다. 이모티콘으로 대체되기 십상이다. 소리 내어 긴 문장을 읽는 활동을 통해서 언니들의 깜빡하는 증상을 조금은 늦출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언니들에게 책을 소리내어 같이 읽자고 제안했다. 치매예방을 위해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니 언니들이 반가워했다. 난 읽기 모임을 통해 언니들 건강도 살피고, 언니들의 소중한 기억을 건져올리고 싶었다.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 만족했지. 그 만족이 맛이지.”

책에서 언니들이 멀어진 지 오래되었다. 책을 읽는다고 하니 처음에는 약간 긴장해 보였다. 그리고 시간도 문제였다. 언니들은 농사일, 공동체 활동 그리고 집안 가사일 등으로 말 그대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바쁜 활동 시간에 또 하나의 활동을 더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었다. 그래서 일주일 한번 공동 작업하는 날을 이용하기로 했다. 점심시간에 언니들과 식사를 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을 책은 음식과 그와 관련한 시골의 에피소드를 담은 것으로 정했다. 작가가 언니들의 나이와 엇비슷하고, 같은 지역의 음식 이야기이니 낯설지 않아서 읽기 좋을 듯했다. 그래서 읽을 글 한 꼭지를 14-15포인트로 크게 프린트하여 ‘소리 내어 책 읽기’ 모임을 시작하였다. 우선 구강운동을 하고,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고, 책에서 소개하는 음식을 마중물 삼아 언니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들은 현재나 가까운 과거보다는 먼 어릴 때로 되돌아갔다. 말을 나눌수록 기억해내는 것이 더 많아졌다. 언니들도 신기해했다.


같이 읽은 책은 소박한 음식과 재미난 에피소드가 어울려서 따뜻한 정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도시인에게 힐링이 될 수 있는 추억거리가 많았다. 나는 비슷한 느낌을 언니들 이야기에서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읽기 첫날에 그 기대가 얼마나 언니들 삶과 먼 것이었는지 알았다. 내가 지역이나 과거의 시점을 하나로 획일화시키고, 음식을 낭만적 추억거리로만 바라보는 TV 예능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각 개인의 삶이 다른 파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다시 자각했다. 일례로 글 속의 강원도 영서 지방의 음식이나 언니들 고향, 현재 살고 있는 곳과 같아서 비슷할 줄 알았으나, 같은 음식이라 해도 조리법이 다른 것이 많았다. 이 차이에는 지역차도 있으나 각각의 경제수준이 큰 몫을 했다. 지금처럼 지역간 교통이 원활하지 않고 지역간 문화를 전달하는 미디어의 발달이 덜 된 때인지라 경제수준에 따른 생활과 음식의 차이가 지금보다 더 커보였다.


언니네텃밭 언니들의 음식 이야기 속에는 가난, 결핍이 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시절, 그리고 가족 그리고 또 다른 가족 등으로 이어지는 퍽퍽한 삶이 있다. 우리가 강원도 영서지방의 음식이라고 말하는 것 속에는 하나의 추억거리로만 좁혀질 수 없는 각각의 쌉쓰레한 맛이 있다. 고향의 맛이 누구에게는 간장에 오랫동안 쩔은 짱아지의 맛일 수 있다. 노랗고 하얀 잎이 하나도 없는 푸르둥둥한 김치일 수도, 사료용 옥수수로 만든 수제비일 수도 있다.


언니들에게 맛을 물으면 이렇게 답하곤 했다. “맛으로 먹나. 배고프니까 먹었지.” “그러나 맛있었지.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 만족했지. 그 만족이 맛이지.”

언니들의 삶이 희망이 되는 세상을

공중파에서 맛집 순례가 한창 인기를 끌었다. 코로나로 전과 같지는 않지만, 영상 플랫폼으로 그 맛의 향연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맛집 순례와 함께 음식 만들기 경연은 여전히 시청자들이 즐기는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 맛의 세상에는 그 맛의 기본 재료를 만드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 맛에 접근하는 삶의 처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경제취약층, 고령층, 농촌의 몰락 등 밝지 않은 사회뉴스에서만 보일 뿐이다.


언니들의 건강을 이유로 시작된 ‘소리 내어 책 읽기’는 언니들의 쌉쓰레한 맛으로 가득찬다. 이들이 말하는 음식의 맛은 농촌과 고향을 떠나 추억하고 싶은 고향의 맛이 아니다. 언니들은 소농의 딸로 태어나서, 소농의 아내가 되어, 소농으로 살아가고 있다. 언니들은 농촌의 과거이며, 현재이며, 또한 미래이다. 농촌에 농사를 자기 없으로 삼는 인구가 줄어들어 언니들은 가까운 미래의 농업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농촌의 고령화 현상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이미 70년대 말부터 들었다. 언니들이 청년이었을 때부터 고령화를 걱정하는 소리가 있었다. 이제 언니들이 그 고령층의 당사자가 되었다. 그들이 어렸을 때 먹었던 음식, 배부른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때를 지났지만, 언니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여전한 듯하다. 그러나 언니들은 오늘도 신나게 웃으며 책을 읽고 지난 과거의 가난을 나눈다. - 20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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