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한 죽음을 선택하는 생명체들

리뷰 : 루이스 세폴포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by roads

아주 오래된 관습

호주의 학자, 데비드 구달이 안락사(AVD, Assisted Voluntary Death)로 생을 마감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아마존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수아르족 인디오의 죽음의식이 떠올랐다. 수아르족 인디오의 죽음의식은 루이스 세폴베다의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 에 나온다. 수아르족은 평화롭게 죽으면 평화로운 내세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스스로 죽음의 순간을 결정하고, 치차 즙과 나테마 즙을 마시고 그 환각증세로 고통 없이 죽음을 맞는다. 산자들은 죽은 자의 용기와 평화를 기원하는 송가, ‘어넨트’를 부른다.


이런 죽음 의식은 데비드 구달의 안락사 과정과 흡사하다. 수아르족의 치차와 나카테 즙은 데비드 구달에게는 정맥주사이고, 수아르족의 어넨트는 데비드 구달에게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이다. 데비드 구달의 마지막 날 모습을 담은 사진은 평화로워 보였다.


우리도 평화로운 죽음에 대한 동경이 있다. ‘편안히 가셨다’ 는 말은 남은 자들에게 보내는 위안이다.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나는 죽음 직전의 그 분들이 어떤 얼굴을 하셨는지 모른다. 이미 생을 마친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죽음 직전의 얼굴을 보신 분들의 말만 전해들었다. 얼굴은 덤덤했고, 얼굴빛도 나쁘지 않았다고, ‘편안히 가셨다’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키우던 개를 통하여 죽음 직전의 모습을 보았다. 개가 죽기 며칠 전 갑자기 걷지를 못하고, 먹지도 않았다. 그러더니 숨이 가빠졌다. 난 놈의 임종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숨소리가 방문을 넘을 정도로 커졌다. 가쁘고 거친 숨을 쉬더니, 목이 부러진 것처럼 고개가 옆으로 꺾이었다. 놈의 밑으로 흥건히 배설물이 고였고, 코 밑으로 물기가 흘렀다. 그것이 끝이었다. 떠있는 두 눈을 감기며 느끼는 놈의 몸은 따뜻했다. 사후 강직이 일어난 것은 반나절이 지나서였다.


그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고통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놈과 나는 두려움에 휘청거리는 날을 보냈다. 수아르족이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놈에게 환각제를 주어서, 평안한 얼굴로 가도록 했을 것이다. 두려움과 고통에 찌든 얼굴로 죽으면 평안하지 못한 동물로 환생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데비드 구달은 식물학과 생태학의 연구자, 교수로 한 평생을 보냈다. 그의 직업, 연구도 안락사 선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생명의 성장, 사라짐을 연구했던 그는 마지막 생애를 호주에서의 안락사 합법화 운동에 매진하였다. 현대 의학이 죽음을 자기 의지로 결정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생명의 담지자인 자신이 아니라 의학적 판단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세계에 우리는 산다.


한 판 싸움을 벌인 뒤에 취하는 죽음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표적인 환경소설이다. 루이스 세폴포다의 글 대부분이 그렇듯이 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책도 ‘자연 대 개발, 원주민 대 백인’이란 이분법적 구도로 아마존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보호 필요성을 전한다.


개발에 밀림의 깊은 곳으로 밀려나는 수아르족, 인간에 복수를 하는 살쾡이, 그리고 인간의 야만성을 잊기 위해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 이들은 승리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탐욕스럽지도 비루하지도 않다. 오히려 아름답다. 아름다운 생명체, 생활에 동화된 독자들은 밀리는 이들의 신세에 분노를 느낀다. 이 책의 목적이다.


데비드 구달의 죽음 소식을 듣고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었는데, 책이 다르게 읽혔다. 죽음을 맞는 아름다운 생명체를 보았다. 내가 아마존에 기대어 사는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그들이 자연친화적 생활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들 방식이 아닌 다른 죽음을 강요하는 현실에 분노한다.


살쾡이 가죽을 얻기 위해 살쾡이 새끼를 죽이고 수컷을 죽음 직전으로 몬 인간에게 복수하는 암 살쾡이가 있다. 암살쾡이를 잡기 위해 수색대가 조직되고, 그 수색대에 수아르족 인디오와 함께 밀림에서 산 경험이 있는 노인이 강제 편입된다. 암살쾡이의 분노가 극에 달했더라도 인간의 거처까지 접근하는 무리한 행동을 하는 이유를 노인은 생각한다.


“짐승은 복수에 나섰다. 하지만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섰던 거야. 그랬다.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인간이 베푸는 선물이나 적선에 의한 죽음이 아닌, 인간과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었다. 백인이 쏜 총탄에 고통을 당하는 수컷과 자신을 죽여줄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노인이었다. 암살쾡이는 노인을 수컷이 괴롭게 숨을 쉬는 곳으로 유인한다. 노인은 암살쾡이의 마음을 읽고 수컷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슴팍에 총을 겨눈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친구 미안하군, 그 빌어먹을 양키놈이 우리 모두의 삶을 망쳐 놓고 만 거야.”


마지막으로 암살쾡이가 희망하는 대로, 암살쾡이와 노인은 한판 싸움을 벌이고, 짐승은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취한다. 죽은 암살쾡이의 털을 어루만지던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린다.


행복한 생을 추구하듯, 마지막 순간도 고통 없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꿈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꿈은 수동적이다.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대한 준비는 없다. 죽음 준비도 결국 죽음 자체보다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착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죽음은 인간의 의지가 범접할 수 없는 초자연적 힘의 영역이라고 남겨둔다.


죽음에 대한 내 입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심스럽다. 만약 부모님이 회복될 수 없는 힘든 병에 고통을 받고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 당사자가 나라면 나는 어떤 결정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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