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허기증

메아리를 기다리며

by roads

일요일 오후, 장보러 가는데 마주편에서 할머니가 노인용 유모차를 밀면서 오신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씀하신다. "방앗간에 왔는데 문을 닫았네." 처음 보시는 분이다. 그 분이 날 아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마주친 사람에게 말을 한 것이다. 딱히 나와 이야기를 하시겠다는 의도도 없다.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분명히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그 점을 알기에, "네, 일요일이라 닫았나보네요" 했다. 방앗간에서 헛걸음을 하신 것이 심히 속상한 모양이다.


그 분을 지나치며 생각했다. 혹시 저 분이 나에게 한 짧은 말 한마디가 오늘 처음 사람의 눈을 보며 하신 말은 아니었을까하고. 나이가 들면 직접 주고받는 말이 점점 적어진다. 그렇다보니 말에 허기증이 생긴다. 길 위에서 만나는 할머니들을 보면 분명하다. 그들은 상대에 대한 경계심 없이 스스럼없이 말을 던진다. 딱히 돌아오는 말이 없어도.


할머니들을 많이 만나는 곳은 오일장이 서는 장이다. 장날이 서는 날이면 노인들이 장으로 간다. 마땅히 살 물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가까운 곳에 마켓이 있지만 장으로 간다. 그들이 검은 봉투를 하나씩 들고, 장 모퉁이에 앉아 두런두런 말을 나누는 모습을 종종 본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좋은 듯 소리들에 파묻혀 있는 작은 모습을.


저 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도 비슷한 처지이다. 오늘 할머니에게 한 응답이 나에게는 오늘 처음 한 말이었다. 비록 짧지만 얼굴을 마주한 말 교환이었다. 그 말 교환이 너무나 하찮고 짧아서 대화로 불릴 수는 없을지라도. 유모차에 상체를 반쯤 기울이고 다니는 허약한 몸에서 나온 소리 또한 약하다. 그 소리가 내 표정에 닿으면 나는 반응을 해준다. 내가 어렸다면 그런 할머니들이 낯설고, 조금은 우스웠을 것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 누구에게 말씀을 하는지 찾아보았을 것이다.


점점 주변에 말을 주고받을 관계가 적어진다. 직접 호흡을 나눌 관계가 없어진다. 이대로 고독사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로 SNS로 대화가 이루어지고, 그 대화도 시간이 지나면서 드물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상대가 경계심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면, 중얼거리듯, 사소한 말을 던지게 된다. 할머니나 나나 말의 허기증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허기증은 우울하고 심란하다.


멀리 있는 지인들과의 요즘 소통하는 방식이 카톡 속에서 한줄 두줄의 짧은 인사이고, 이모티콘을 나누는 정도이다. 긴 대화가 끊긴 지 오래다. 전화로 하는 대화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길지만 대화는 끊어지면서 산발적으로 간다. 때문에 내 심정, 감상을 길게 이야기하기 힘들다. 얼굴을 마주하는 수다도 마찬가지다. 그저 단상들만을 핑퐁식으로 나누는 것이 요즘의 대화다. 누군가 길게 이야기하면 분위기 망치는 꼴이 되어버린다. 종종 내가 망치는 사람 측에 속한다. 수다가 그리운 것이다.


입을 풀고 싶은 날, 글을 쓰기로 했다. 내 글쓰기는 일방적 수다다. 일상에서 결핍된 대화, 수다를 해소하는 방법이다. 일방적으로 시작하지만 공감이 필요하다. 그래서 글을 카페나 블로그에 올린다. 내 글이 메아리처럼 되돌아 올 수도 있겠지만, 나간 소리는 돌아올 때 다르게 진동할 것이다. 내 귀로 돌아온 메아리는 얼마나 다른가. 내 소리가 가닿은 곳의 거리를, 소리가 부딪힌 바람의 농도를 싣고 온다. 만약 누군가 그 소리를 받아 그의 소리를 실어준다면 더욱 반갑겠다. 산을 오르는데, 내려가는 데 나 혼자가 아님에 가슴이 흔들릴 것이다. 그 소리가 종종 구조 신호라면 뒤돌아오는 소리, 보태어진 소리는 얼마나 고마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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