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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n 21. 2021

오늘 밤은 부디 잠을 깨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빠,


기침이 더 심해지셨네요.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오늘 같은 날에도 그게 아빠의 기침을 더 심하게 하는 건 아닌가 노심초사하게 돼요.


저는 지금 건넌방에서 아빠의 기침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답니다.


처음 시작은 에워낼 듯하다가, 끝까지 사라질 듯 말 듯 튜브에 마지막 바람 빠지는 소리 잔상처럼 남기고 가지요.


아빠가 기침을 한번 시작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게 되는 것 같아요.


애써 외면하고 싶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기침을 멈추게 할 수 없잖아요.


지금 이 순간에는 아빠가 물을 찾으실 때 따뜻한 물을 보온병에 담아 드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거예요.




어제는 블루베리 때문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죠.


무농약이라는 생 블루베리를 주문해서 아빠만 먹게끔 깨끗이 씻어놓았는데,


"느그는 안 먹나?" 라고 물어보실 줄 몰랐어요. 


이건 유기농이라 좋은 거니까 아빠만 먹는 거라고 말씀드렸지요.


근데 아빠는 그게 싫으셨나 봐요.


혼자 먹으면 무슨 맛으로 먹냐시며, 아빠가 드실 때마다 엄마랑 제 입에 하나씩 넣어주셨잖아요.


우리는 안 먹어도 되는데 아빠가 괜히 고집부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늘은 또,


엄마가 아빠 드릴 거라고 냉장고에 수박 안 쪽 부분만 잘라놓은 게 있었는데,


이건 아빠만 드시는 거고 우리는 안 먹어도 된다고 하니까 아빠는 수박을 안 먹는다고 하셨어요.


왜 아빠만 먹이는 거냐며 짜증을 내셨고 아빠만 힘을 낼 게 아니라 엄마가 먼저, 그리고 저도 힘을 내야 한다고 지치신다는 듯 말씀하셨어요.


맞는 말씀. 알겠다고 하면서도 선뜻 마음은 납득하지 못했죠.


수박 그거 얼마 한다고, 유난 떨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인 건 알겠는데...


그렇게 짜증을 내실 정도까지 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었거든요.


하지만 아빠께서 "내가 금방 죽나?"라고 물어보셨을 때라야, 


비로소 아빠가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죠.


그런데 전 "그야 어떻게 될지 모르죠."라고 괜히 퉁명스럽게 말해버리고 말았고...


수박을 먹긴 먹었는데...


당황스러운 질문과 답변을 계속 곱씹으며 아빠가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다는 게 너무 죄송했어요.




아빠,


우리는 아직 모두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모두 다 과도하게 서로를 생각해서 작고 작은 다툼이 생기는 것 같아요.


아빠는 유난떨고 부담스러운 거 싫어하시는 거 알아요.


그리고 항상 우리를 먼저 챙겨주셔야 한다는 책임감이 크신 것도 알아요.


하지만 아빠,


아빠도 이제 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어요.


아빠 생각해서 저와 엄마 권하는 것들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먹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빠 말대로 수박 그거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지금까지 한 번도 산 적은 없지만, 알고 보니 블루베리 그거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잖아요.


아빠가 퇴원하시던 날 "아프다, 먹고 싶다"라고 하시며 잘 드시던 모습이 차라리,


아빠께서 병을 인정하고 열심히 나아야겠다는 의지를 보이시는 것 같아 더 좋았거든요.


지금은 아빠만 생각하셔야죠.


이제는 좀 남들이 아빠께 해 주려고 하는 걸 기꺼이 다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어요.


아빠,


저도 이제 어디 가서는 나이 들었다 소리 듣는 다 큰 어른이에요.


엄마도 환갑을 바라보는 어엿한 중년의 어른이시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엄마와 저에게 절대 운전대를 맡기지 않으셨고, 지금도 기침을 하면서도 피곤하다 하시면서도 고집부리시는 건 여전시네요.


하지만 결국에는 엄마가, 그리고 제가 운전대를 잡고 아빠를 태우고 다녀야 할 거란 걸 알아요.


- 엄마에게 물을 끓이라, 몇 분 뒤에 불을 꺼라,


- 저에게는 할 일을 어서 빨리 끝내라, 차가 몇 시 차면 언제 출발해라,


이제부터는 이런 사소한 것들마저 아빠가 신경을 쓰시면 안 되는 거예요.




물론 제가 아빠가 환자라는 걸 자꾸 잊어버리는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아빠가 물을 찾으시기 전에 먼저 준비해 놓고 과일도 묻기 전에 먼저 갖다 드려야 하는데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네요.


 아빠가 기침을 하실 때까지, 아빠가 기운이 없어 멍하니 앉아계실 때까지....


 무심코 아빠가 어련히 드시고 싶으면 말씀하시겠지 하고 가만히 있었나 봐요.


이제껏 그래 왔을지 몰라도 이제부턴 그게 아닌데. 아빠께 아빠는 환자인 걸 좀 아시라고 말씀드려놓고 정작 저는 그러지 못해 죄송해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한 거면 도대체 언제쯤 알 수 있을까요.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거면 더욱더 아빠의 병세가 악화될 때는 또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하는 걸까요.




아빠,


아빠께 이젠 좀 걱정을 덜고 마음을 편안히 하는 연습을 하시라고 말씀드렸을 때,


"니가 먼저 믿음을 줘야지."


라고 하셨죠. 아직도 아빠께서 걱정을 놓지 못하는 건 제가 아빠를 그렇게 길들여 놓았기 때문이었어요.


아빠의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은데, 그 말을 듣고 있는 제 귀는 여전히 먹통이네요.


좋은 소식 하나도 안겨 드리지 못하고 밝고 긍정적인 기운을 드리지도 못해 정말 죄송해요.


아빠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자조할 것이 아니라,


우선 말씀대로 저는 제 할 일을 끝내도록 할게요.




아빠,


부디 오늘 밤은 기침이 덜 하셨으면 좋겠어요.


온 몸에 파문이 이는 기침때문에 제대로 된 잠 한숨 못 주무시는 줄 모르고 


그런데 저는 세상천지가 떠나가도 모르게 쿨쿨 자버리니 그것마저도 죄송해요.


아침에 드리는 "안녕히 주무셨어요"라는 문안인사가  원망스러운 요즘,


오늘 밤은 부디 잠을 깨지 않으셨으면 좋겠요.





염치없지만 조금만 더 힘내 주세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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