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동네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었어.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란 책인데, 이건 중요한 건 아니고…….
어쨌든, 1층 종합 자료실에서 책을 빌리고 3층에 있는 옥외 휴식터에 올라갔어. 거기서만 흡연이 가능했거든.
비 오는 평일 오전 10시라 그런지 사람이 없더라고. 휴식터 한쪽에는 작은 정자 같은 게 있어서 그 밑에서 비를 피하며 한 손에 빌린 책을 들고 담배를 피웠어. 정자 지붕 처마에서 빗물이 떨어지는 걸 멀뚱히 보면서.
한 세 모금 정도 빨았을 거야. 저쪽에서 옥외 휴식터 철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누가 정자 밑으로 오더라고. 보니까 도서관 사서인 거 같았어. 목에 공무원증을 걸고 있었거든.
그 사서가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고 몸을 막 뒤지더라고. 라이터를 찾는 거였겠지. 한참을 그러고 있길래 내가 라이터를 빌려줬어. 사서는 멋쩍게 웃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지.
한동안 둘이 그렇게 정자 밑에서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고 있었어. 날씨 얘기 같은 시답잖은 대화를 하면서 말이야.
그러다가 담배를 반쯤 태웠을 때, 사서가 화제를 돌렸어. 여기서부턴 그 사서와 나눈 말을 조금 인용해 볼게.
- 이런 날씨엔 조금 독특한 사람들이 찾곤 해요.
- 아, 그래요?
- 네. 작가들이 자주 찾죠.
- 지역 작가들이 꽤 있나 보죠?
- 음, 네. 뭐, 지역 작가들도 오긴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도 꽤 오세요.
- 강연 같은 거라도 하시나 보죠?
- 아뇨. 개인적인 일로들 오시죠. 지하 자료실에요.
- 지하에도 자료실이 있었어요? 여기 꽤 다녔지만 지하에는 한 번도 안 가봤네요.
- 네. 지하에도 자료실이 있긴 한데, 일반 개방은 하지 않아요. 보통은 오래돼서 손상되거나, 오 년 동안 대여가 없는 자료들을 보관하는 곳이에요.
- 아, 오래된 책들은 다 처분하는 줄 알았어요.
- 네, 다 지하에 내려놓죠. 말이 자료실이지 쓰임은 거의 창고예요.
- 그렇군요. 근데, 작가들이 거기를 자주 이용하나 봐요?
- 네. 거기서 자기가 쓴 책을 찾아요.
- 아, 자기가 쓴 책이 버려진 게 안타까워서 그런가 보죠?
- 그런 마음도 있겠지만……. 그거랑은 조금 다른 이유가 있어요.
- 뭔데요?
사서는 여기까지 말하고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냈어. 라이터로 사서의 담배에 불을 붙여준 다음에 나도 한 개비 새로 물었어.
- 이런 데서 일하면 작가들하고 종종 말할 기회가 있는데요.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해요.
사서가 작가들한테 들은 말은 대충 이런 거였어.
매일 부유하는 단어들을 붙잡으려 녀석들과 씨름한다.
어쩌다 운 좋게 손아귀에 잡힌 단어들을 덕지덕지 이어 붙여 문장 비슷한 걸 만들기도 한다.
서로 어울린다고 생각한 단어들을 나란히 앉혀놓으면, 어쩔 땐 보기 좋다가도 다시 보면 영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단어, 한 문장으로 세계를 만드는 일은 이토록 만만찮다.
- 글쓰기가 그들을 자유롭게 해 주지만 어쩔 땐 그 자유로움이 그들을 짓누를 때도 있어요. 그럴 때가 더 많은 것 같지요.
그들은 길게 늘어선 문장들을 밟고 탁탁 도약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단어와 단어 사이 혹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폭 빠져 허우적댈 때도 많습니다.
운이 좋으면 으쌰 하고 쉽게 빠져나오겠지만,
평생 그 안에 갇혀 못 나오는 경우도 수두룩 해요.
그러면 그 글은 미완성된 건물처럼 흉물스러운 뼈대만 드러낸 채 폐허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안에 갇힌 나는 나조차도 곧 잊어버리게 되죠. 수많은 잃어버린 나들.
사서가 담배 연기를 길게 뱉고 말했어.
- 지하 자료실에는 그렇게 폐허가 된 글들 속에 갇힌 작가들이 수없이 많아요. 작가들은 그런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기 위해 찾아오지요.
- 책 속에, 문장 사이에 갇힌 자신을 찾으러 온다는 거군요.
- 네. 보통은 잊고 지내는데, 가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불현듯이 생각이 나나 봐요.
- 그럼 와서 다들 잘 찾아가나요?
- 대부분은요. 근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서요. 책에 갇혔다고 해서 그 책을 탁! 펼치면 잃어버린 내가 짠! 하고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빠져있으니 쉽게 보일 리 없죠. 문장과 문장 사이를 일일이 다 살펴봐야 해요.
- 어떻게요?
- 글쎄요. 그건 작가들만 아는 거 같더라고요. 어떤 문장에서 자신이 허우적댔었는지 기억을 더듬는 거겠죠. 덕분에 지하 자료실에선 여기저기서 선 채로 자신의 책을 열심히 읽는 작가들을 볼 수 있죠.
여기서 사서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갑자기 쿡쿡 웃었어.
- 저번에 어떤 작가는 일주일 내내 자료실에 와서 책을 읽었지만 잘 못 찾더라고요. 알고 보니 잃어버렸던 자신이 문장 사이에서 빠져나오려다가 책갈피 속에 미끄러져 있었대요.
- 책갈피예요?
- 네, 책갈피요. 책장하고 책장 사이. 글씨 한 줄이 책갈피 속으로 길게 늘어져있길래 봤더니, 그 속에서 글씨 한 줄을 붙잡고 빠져나오려고 기를 쓰고 있더래요.
사서의 얘기를 듣고 나도 따라 웃었어. 생각해 봐. 글씨를 붙잡고 책갈피 속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 말이야.
- 그렇게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으면 어떻게 되나요?
-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글이 더 잘 써지는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찾아가는 건지……. 작가 본인만이 알겠죠.
우린 그렇게 담배 두 개비를 같이 피우고 헤어졌어. 그 사서는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면서 내려갔지. 나도 빌린 책이 젖지 않게 겉옷으로 감싸고 정자 밑을 나왔어. 도서관을 나서면서 지하 자료실에 잠깐 가볼까 하다가 그냥 집으로 걸어왔어.
요즘도 비 오는 날엔 그런 모습을 상상하곤 해. 도서관 지하 자료실에서 밤새 고심하며 쥐어짜 낸 문장들 사이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으려고 애쓰는 작가들의 모습.
비 오는 숲 속같이 어두운 책장들 사이에서 고목처럼 여기저기 선 채로 자신의 오래된 책에 얼굴을 파묻은 작가들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