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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폼소설] 학급회의

by 홍윤표

2025년 10월 31일(금)
5학년 4반 2학기 제3회 학급회의
안 건 : 31번의 정체
입안자 : 26번 라은우

"지금부터 5학년 4반 2학기의 세 번째 학급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반장이 칠판 앞에서 말했다. 부반장은 분필을 들고 반장 옆에 서 있었고, 선생님은 칠판 옆의 선생님 자리에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의 안건은 26번 라은우 학우가 입안한 안건입니다. 라은우 학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은우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26번 라은우입니다. 먼저 발언 기회를 준 반장에게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라은우가 반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반장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오늘 제가 학급 회의를 통해 학우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은 바로, 31번의 정체입니다."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네. 저도 우리 반에는 30번까지 밖에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라은우가 4 분단 셋째 줄에 앉은 30번 이영호를 가리키며 말했고, 아이들이 고개를 돌려 이영호를 쳐다봤다. 30번 이영호는 주위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전 여러 번 느꼈습니다. 우리 반에는 30번 이영호 학우 다음에 31번이 있다는 걸 말입니다."
"31번이 있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라은우 학우."
반장이 물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한 명의 학우가 우리 반에 있다는 겁니다. 바로 31번 말입니다."
아이들이 다시 한번 수군거렸다. 반장이 말했다.
"라은우 학우.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네."
라은우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처음 31번의 존재를 눈치챈 건 우유 배달 당번을 했을 때였습니다. 매일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우유 배달 차가 오면, 그 주의 당번은 우리 반의 우유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한 달 전, 제가 우유 당번이었을 때였습니다. 전 습관적으로 우유 개수가 맞는지 꼭 세어보곤 했습니다. 기껏 교실까지 가져왔는데 모자라서 일 층까지 다시 내려가는 일이 없도록 말이죠."
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도 전 어김없이 우유를 세어봤습니다. 물론 가져올 땐 서른 개였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수거한 빈 우유팩을 한 번 더 세어봤습니다. 전날에, 다 먹은 우유팩도 남김없이 수거하라는 선생님의 당부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른 개여야 할 빈 우유팩이 서른한 개가 있었던 겁니다."
"그건 다른 반의 누군가 우리 반에 버리고 간 게 아닐까요?"
"저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도 계속 서른한 개가 수거되었습니다. 오늘까지도요."
라은우는 교실 뒤 구석에 놓인 플라스틱 우유 상자를 가리켰다. 안에는 아이들이 다 먹고 버린 빈 우유팩들이 들어있었다.
"우유 당번이 끝난 뒤로도 계속 세어봤습니다."
반장이 부반장을 돌아보자 부반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교실 뒤로 가 우유 상자의 우유팩을 세었다.
"서른한 개 맞습니다."
아이들이 다시 수군거렸다. 반장이 손을 들어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증거가 또 있단 말씀이신가요?"
"네. 물론입니다. 우리 반은 매일 번갈아 가며 둘씩 짝지어서 방과 후 교실 쓰레기를 체육관 뒤편의 분리수거장에 버리고 있습니다. 우리 반 학우가 총 서른 명이라면 둘씩 짝지었을 때 매번 같은 번호끼리 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죠?"
"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언제부터인가 짝이 바뀌고 있습니다."
"인원수가 짝수라면 매번 짝이 똑같아야 하는데, 홀수라서 짝이 바뀐단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역시 이해가 빠르다. 과연 우등생 반장이다. 라은우는 새삼 느꼈다.
"오늘 쓰레기 버린 학우는 누구인가요?"
반장의 말에 6번 조일윤과 7번 이현주가 동시에 손을 들었다.
"어떤가요?"
6번 조일윤이 말했다.
"라은우 학우의 말이 맞습니다. 저번에 버렸을 땐 5번 황연희 학우와 짝이었는데 오늘은 7번 이현주 학우와 짝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보십시오. 총인원이 홀수이기 때문에 매번 짝이 바뀌고 있는 겁니다."
"잠깐, 그럼 30번 이영호 학우는 저번에 누구와 같이 버린 건가요?"
이영호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저번에는 어……. 누구였더라.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어쨌든 누구랑 버리긴 버렸는데……."
"잘 생각해 보세요. 중대한 사항입니다."
반장이 다그치자 이영호는 더 당황했다.
"어, 글쎄요. 그전에는 29번 유소영 학우와 같이 버렸고, 그다음에는……. 죄, 죄송합니다.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반장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영호 학우의 잘못이 아닙니다. 바로 저게 31번의 무서운 점입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우리 5학년 4반에 깊숙이 숨어있는 겁니다."
"음, 정확히 언제부터 31번의 낌새를 눈치챘나요? 라은우 학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한 달 전 우유 당번이었던 바로 그 주부터입니다. 그전 주 금요일 소풍날에 버스에서 반장이 인원 체크할 때는 분명 서른 명이라고 말한 걸 기억하니까 확실합니다."
반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맞습니다. 소풍날에는 분명 서른 명이 버스를 탔지요. 그럼, 라은우 학우는 그 31번을 본 적 있나요?"
라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아직 실제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조금 애매하군요. 아직까진 심증만 있을 뿐, 31번이 존재한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직 없어 보이는데요."
"아뇨. 있습니다, 증거."
"뭔가요?"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을 겁니다."
"그게 뭐죠?"
라은우는 대답 대신 부반장을 바라봤다. 반장도 고개를 돌려 부반장을 봤다. 부반장은 아까 우유팩을 세어본 뒤, 반장과 라은우가 얘기하는 동안 반장 뒤에서 교실의 아이들 수를 계속 세고 있었다.
"마, 맞습니다. 지금 교실에 서른한 명이 있습니다."
"확실한가요, 부반장?"
"네, 확실합니다. 세 번이나 세어봤는데 틀림없이 서른한 명입니다."
이번엔 아이들은 수군거리지 않았다. 다들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이제 선생님이 나설 차례다. 라은우는 선생님을 바라봤다.
"선생님. 지금 바로 학우들의 가면을 벗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은 라은우를 빤히 쳐다봤다. 가면 뒤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알겠어요. 여러분, 모두 가면을 벗도록 하세요."
아이들은 구시렁대면서 하나둘씩 가면을 벗었다. 반장과 부반장도 가면을 벗었다.
"존경하는 학우 여러분. 제가 오늘 학급 회의를 개최하자고 선생님께 건의드린 건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핼러윈 데이야말로 31번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라은우는 아이들의 맨얼굴을 둘러보며 말했다.
"학우 여러분. 모두 지금 자신의 짝꿍을 바라봐주시기 바랍니다. 맨얼굴을 한 짝꿍의 얼굴 말입니다.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옆에 있는 짝꿍이 가면을 벗지 않았다면, 그가 바로 31번입니다."
모두 자신의 짝을 쳐다봤다. 짝이 맨얼굴인 걸 확인하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그리고, 4 분단 맨 앞줄에서 소리가 들렸다. 17번 임가은이었다.
"으, 은성아. 왜 아직 가면을 안 벗는 거야?"
임가은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짝꿍을 쳐다보고 있었다. 임가은이 은성이라 부른 짝꿍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은아, 난 여기 있는데."
4 분단 맨 뒷줄에서 누군가 일어서며 말했다. 10번 김은성이었다.
"너, 왜, 왜 거기 있어? 네 자리 여기잖아."
"수업 시간에 늦어서 뒷문으로 몰래 들어오는 바람에 빈자리 아무 데나 앉았어."
"그, 그럼 내 옆에 얘는……."
임가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임가은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아이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교실 안은 한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라은우가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그게 바로 31번의 무서운 점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녀석은 존재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우리들 사이에 섞여 있던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입니다."
교실 안은 어느새 4 분단 맨 앞줄에 앉은 가면 쓴 녀석을 둘러쌓고 나머지 아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싼 형세가 되었다.
"자, 이제 정체를 드러내시지. 31번!"
라은우가 녀석을 가리키며 외쳤다. 녀석은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그리곤 울상을 지었다.
"나, 난 가면을 쓰지 않았어. 이건 내 얼굴이야."
녀석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져 볼 위로 흘렀다.
"제가 굳이 학급 회의를 오늘 하자고 건의한 건 바로 이거 때문입니다. 모두 가면을 쓰고 오면 녀석도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맨얼굴을 당당히 드러내고 우리 사이에 섞일 수 있는, 바로 오늘 같은 핼러윈 데이야말로 녀석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말입니다."
라은우가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말도 안 돼. 저게 맨얼굴이라고?"
"우리랑 다른데?"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자, 31번. 모든 게 끝났다. 순순히 네 정체를 밝혀라!"
아이들의 이목이 31번에게 쏠렸다.

31번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얘들아, 제발 정신 차려. 나야 나. 31번 강윤성."
31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얘들아 제발. 아직 모르겠어? 난 너네랑 같은 반이었다고."
"흥, 무슨 소리냐. 우린 너 같은 애 몰라."
라은우가 냉소했다.
"네 정체가 뭐지? 귀신이냐? 핼러윈 데이에 활개 치는 유령이냐고!"
유령이라는 말에 아이들이 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야. 아니라고."
31번이 울먹이며 말했다.
"유령은 바로 너네들이잖아. 아직도 모르겠니?"
"뭐라고? 무슨 헛소리야!"
"유령은 바로 너네들이라고. 아까 말한 소풍날에……. 버스가 전복해서 너희 모두, 불에 타 죽었잖아."
교실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무, 무슨 소리야? 우리가 유령이라니! 우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아니. 너희들 모두 그날 죽었어. 선생님도 포함해서."
31번 강윤성이 선생님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가면을 쓴 채.
"이상한 소리 그만해! 우리가 유령이라면 넌 뭐지?"
"난, 난 그날 죽지 않았어. 우리 반에서 나만 살았다고."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네 말 따라 버스가 전복했다면 어떻게 너만 살아날 수 있지?"
"난 그날 버스를 타지 않았어. 아니, 못 탔어. 너희들 때문에."


"반장, 인원수 체크했지?"
"네, 서른한 명 맞습니다!"
반장이 자리에 앉자 버스가 출발했다.
"야, 윤성이 새끼 지 혼자 남겨두고 버스 간 거 알면 어떤 기분일까?"
"킥킥, 아 그 새끼 표정을 봐야 하는 건데."
"야, 너희 나중에 쌤이 알면 어쩌려고 그래?"
"잘못 세었다고 하면 되지. 그러는 너네도 아까 왜 쌤한테 말 안 했냐? 니들도 윤성이 그 새끼 놀려먹는 거 재밌잖아."



"그날, 너희가 화장실에서 늦게 나온 나만 빼고 출발해서 난 결국 버스를 못 탔어. 그래서 나만 산 거야. 알겠어?"
반장과 은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서른 명. 서른한 명. 우리 반 총인원이 몇 명이었지?
"아,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선생님, 이 새끼한테 뭐라 말 좀 해주세요."
은우가 선생님을 돌아보며 말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선생님이 가만히 가면을 벗었다.
선생님의 얼굴은 끔찍한 화상으로 뒤덮여 있었다. 은우가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니, 겁에 질린 아이들의 얼굴에도 마찬가지로 온통 화상이 있었다. 가면 속의 얼굴들.
"너희들 언제까지 사람인 척할 거야. 제발 이젠 그만 가줘. 가면은 벗어버리고, 우리 교실도, 나도 다 내버려 두고 이제 그만 가라고!"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선생님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 이제 갈 시간이에요. 모두 윤성이에게 작별 인사 하도록 해요."

붉은 저녁노을이 텅 빈 교실을 조용히 채웠다. 윤성이는 자리에서 혼자 흐느끼다가 가방을 메고 교실 문을 나섰다.

핼러윈 데이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내세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인간 세계를 찾는 날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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