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한낮의 한적한 버스를 타는 걸 좋아해요. 출퇴근 시간의 복잡함이 다 하차하고 맑은 햇빛만 가득 싣고 가는 버스 말이에요.
그래서 가끔 조퇴를 하고 일부러 버스를 타기도 한답니다. 휴가 때는 하루 종일 버스만 타고 종점에서 종점까지 다니기도 해요.
가장 좋은 시간대는 두 시 정도예요. 오전의 분주함과 오후의 나른함 사이에 절묘하게 걸쳐있는 시간이죠.
어제도 전 조퇴를 하고 한 시쯤 버스를 탔어요. 버스 안에는 기사 아저씨랑 장을 보고 오신 할머니랑 엄마 품에 꼬옥 안긴 아가랑 아가 엄마만 타고 있었어요.
전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으며 창밖을 봤어요.
따뜻한 오렌지색 햇빛이 차창을 통해 제 손등에 내려앉았어요. 조그만 정사각형의 햇빛이요.
전 한참을 바라보다 햇빛을 살며시 들춰봤어요. 맞아요. 어렸을 적에 판박이 스티커를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자 햇빛이 살짝 들춰지고 그 아래 휴대전화 번호가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네, 공일공으로 시작하는 휴대전화 번호가 분명했어요. 떼어낸 조그만 정사각형 햇빛은 바람에 날려 휘리릭 창밖으로 날아갔어요.
오렌지색 햇빛으로 쓰인 그 번호를 보고 있자니 왠지 전화를 걸고 싶어 졌어요. 그렇게 하면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거든요.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를 누르고 기다렸어요.
띠리리리. 띠리리리. 찰칵.
여보쇼. 걸걸한 목소리의 아저씨였어요.
전 순간 당황했어요.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거든요.
전 디즈니 만화영화에 나올 법한 예쁜 공주님 목소리나 귀엽고 작은 동물친구의 목소리를 기대했거든요. 따뜻한 햇빛이 알려준 번호이니깐요.
뭐여! 또 누가 내 번호로 장난질이여! 엉?!
전 놀라 황급히 전화를 껐어요.
창밖을 보니 해님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는 게 보였어요.
저 앞에서 버스기사 아저씨도 웃고 있었어요.
뒷자리의 할머니와 아기 엄마도 절 보고 웃고 있었고요.
아가도 엄마 품에 꼬옥 안긴 채 절 보고 싱글벙글 웃고 있지 뭐예요.
전 얼굴이 빨개져서 얼른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어요.
당신도 조심하세요. 오늘처럼 햇볕이 따뜻한 날에는 해님이 어떤 장난을 칠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