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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Oct 28. 2023

나도 내 새끼도 잘 돌보고 싶다

경력 단절되는 소리


  

내게 가장 무서운 건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이다


- 실비아 플라스     




대학교 졸업 후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아나운서로 일해왔다.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차비부터 아나운서 아카데미 비용까지 마련했고,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을 돌며 수백 장의 이력서를 쓰고 수십 번의 면접을 봤다. 사내 아나운서로 시작해 케이블 방송국을 거쳐 지상파에 입성하기까지 카메라 앞에서의 수많은 NG와 자책이 있었다.     

 

꿈 많은 지망생에서 어설픈 초짜배기 방송인을 거쳐 베테랑 아나운서가 되기까지 다 셀 수도 없는 ‘피 땀 눈물’이 있었다. 아나운서라는 내 꿈을 위해 면접에 떨어져도 다시 이력서를 쓰고 피디에게 욕을 먹어도 다시 연습했다. 온에어 불이 켜지면 벌벌 떨던 나는 이제 카메라 앞에서 제일 힘차고 자신감 넘치고 능수능란하다. 20대의 ‘다시’는 쌓이고 쌓여 30대의 ‘실력’이 되었다.    








  

그렇게 쌓아온 나의 경력이 멈춘 건 임신 중기 배가 불러오면서였다. 초기에는 입덧을 참고 쏟아지는 잠을 이기고 두통을 참아가며 일할 수 있었지만, 점점 불러오는 배와 불어나는 체중으로는 일하기가 힘들었다. 체력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남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카메라 앞에 서고 보여지는 일을 하는 아나운서라는 직업의 특성상 사람들은 ‘배부른’ 아나운서를 부담스러워했다. 나는 오히려 입덧이 심했던 초기보다 안정기여서 몸만 무거울 뿐 일은 더 잘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배려와 부담 그 어디쯤에서 나에게 ‘안 되겠다’ 말했다. 아이가 내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만큼 차곡차곡 쌓아온 내 경력은 더 이상 높아지지 않았다. 내 실력과 능력의 정점, 그 꼭대기에서 임신부는 무거운 배를 부여잡고 내려와야 했다.      




내 실력과 능력의 정점, 그 꼭대기에서 임신부는 무거운 배를 부여잡고 내려와야 했다




그렇게 출산하고 본격적인 독박육아가 시작되었다. 거기에 코로나까지 겹쳐 일도 외출도 쉽지 않았다. 온종일 집 안에서 내 품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아이와 씨름하다 보니 우울증은 깊어져 갔다. 수백 명의 관객들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던 내가 현관문을 여는 것 자체가 두려워졌다. 신생아 육아 앞에서는 아나운서, 작가, 선생님이라는 나의 경력은 다 쓸모없었다. 카메라 앞에서 뉴스를 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날들은 과거가 아니라 전생이 된 것 같았다. 난 이제 엄마로 다시 태어나 아나운서였던 내가 낯설다. 그건 한낱 꿈이었던 것 같다.


몸도 맘도 일도 임신 전의 상태로 회복하지 못할까 봐 매일 밤 울었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돌아갈 자리가 보장되지 않은 프리랜서라는 신분, 보이는 일이라는 이유로 어느 순간부터 외모와 나이가 무기가 되어버린 아나운서라는 직업, 힘든 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울 줄 몰랐던 육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바이러스까지. 나는 어떡해야 하지? 내 슬픔은 깊고 막막했다.     





 엄마가 된 내가 자꾸만 엄마가 되기 전의 나를 그리워했다.     





임신은 내 몸을 다 뒤바꿔놓았고, 출산은 날 엄마로 만들었고, 육아는 몇 달 혹은 1, 2년으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이 모든 변화와 기약 없는 육아 앞에서 내 경력은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공백은 내가 일을 자발적으로 그만뒀기 때문도, 내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도 아닌데 억울했다. 그 어쩔 수 없음이 너무나 허망했고 원망스러웠다. 일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지만, 육아가 내 삶의 전부가 될까 봐 엄마가 된 내가 자꾸만 엄마가 되기 전의 나를 그리워했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출산과 아이로 인해 생의 단절을 겪어야 했을까. 새로 태어난 한 생명이 여성이라는 한 존재의 삶의 흐름을 막게 될 수밖에 없는 이 구조는 왜 무너지지 않을까. 임신도 출산도 육아도 포기도 희생도 결국 하나의 성(性)이 온전히 떠안을 수밖에 없는 이 쏠림은 평평해지기는 할까. 가능은 한 걸까. 간접적으로는 절반도 알 수 없는 영역이라 그런 걸까.     


청춘 바쳐 기를 쓰고 쌓아온 경력인데, 나는 이 경력을 단절하지 않고 길게 이어가고 싶다. 뭐든 쌓이는 건 어렵고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라지만,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들여 쌓은 ‘경력탑’을 무너뜨리고 싶진 않다. 엄마 위에 다시 차곡차곡 잘 포개어 얹고 싶다.   

   

세상과 단절하려고 낳은 애가 아니다. 더 넓게 이어가라고 나에게 온 생명일 것이다. 일만 하지 않고 육아만도 하지 않고 나를 위해 일하고 아이를 위해 육아하며, 나도 내 새끼도 잘 돌보고 싶다.


















안녕하세요!

임희정입니다.


<엄마라는 부캐>연재 글을 응원해주시고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보내주시는 응원, 전해주시는 댓글

하나하나 깊게 읽으며 힘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기존 매거진으로 연재했던 <엄마라는 부캐>를

<질문이 된 엄마>라는 이름으로 매주 토요일 브런치북 연재를 이어갑니다.


임신, 출산, 육아를 겪으며

새롭게 생겨나고 품었던 질문들에 대해 잘 기록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오늘도 저는 일과 육아 사이에서

무너지고 힘들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또 글을 쓰고 연재하며 힘을 내봅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기에

저도 쓸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




-임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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