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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Dec 01. 2023

죽어도 죽지 않을게

아이가 태어나고 내가 다시 태어났다



   

흉터가 되라.

어떤 것을 살아 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흉터〉, 네이이라 와히드

 《마음챙김의 시》류시화 엮음




        

글을 쓰는 식탁 옆에 분유와 젖병이 있던 시간을 지나 블록과 뽀로로 장난감이 놓인 시기가 됐다. 아이를 키워 본 부모들은 알 것이다. 이 문장이 뭘 말하는지. 갓 태어난 아이가 누워 있거나 안겨만 있는 신생아 시기를 지나, 고개를 들고 뒤집고 걸음마를 시작하는 영아기를 지나, ‘안아줘! 안아줘!’와 ‘아니! 아니’를 무한히 반복하며 매 순간 힘들게 하지만 ‘엄마 사랑해! 고마워!’와 같은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고달픔을 잊게 만드는 유아기가 됐다는 것. 적어도 아이의 생일을 두 번 이상 지냈으며, 태어나 가장 낯설고 고단한 인내의 시간을 버텨냈다는 것이다.      


‘출산의 고통만이 아니라 출산 이후의 고통도 오랫동안 말해지지 않은 고통이었다’고 했던가. 아이를 두고 엄마가 우울을 이야기하는 것과 아이 옆에서 육아의 고통에 대해 말하는 건 자기 검열에 의해서도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도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시기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들어도 아이는 너무 예쁘잖아요’라고 말하는 그 순서를 한 번쯤은 바꾸고 싶었다. ‘아이는 예쁘지만 나는 너무 힘들었어요’라고 말이다. 예쁨이 힘듦을 다 덮을 수 없고, 힘듦이 예쁨을 덜하게 만들지도 않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  





   



열여섯 명의 여성작가가 ‘엄마 됨’에 대해 쓴 책 《분노와 애정》, ‘모든 여성이 엄마가 될 필요는 없다’ 말하는 이스라엘 사회학자 오나 도나스의 책 《엄마 됨을 후회함》, ‘여자에게 독신은 홀로 광야에서 우는 일이고 결혼은 홀로 한 평짜리 감옥에서 우는 일이 아닐까’라는 문장을 쓴 신현림 시인의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 이 세 권의 책은 그 시기의 나에게 ‘엄마 위로 교과서’ 같은 책이었다.      





‘내 몸에서 나온 네가 내 과업이듯, 나의 다른 일들도 나의 과업이란다.’    

 

(출산 후) ‘위풍당당히 사라져버린 나의 섹슈얼리티를 애도한다.’     


‘아이들은 내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격렬한 고통은 안겨준다. 양가감정이라는 고통이다. 나는 쓰라린 분노와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 더없는 행복에 대한 감사와 애정 사이를 죽을 듯이 오간다. 가끔 내가 작고 죄 없는 아이들에게 느끼는 감정에서 이기적이고 속 좁은 괴물을 본다.’     


‘나는 엄마인 작가들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메모를 남기고, 일기를 쓰고,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하고, 인간에게 가능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의미를 갖는 주제가 있음을, 그동안 작가들은 엄마가 아니었기에 사실상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주제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분노와 애정》 중에서     








‘엄마로서의 삶에 대한 후회를 표현할 만한 언어는 없다.’     


‘몇몇 여성은 아이가 없었으면 하는 소망과 실재하는 아이에 대한 애정을 동시에 느낀다.’     


‘고통을 당하지 않고자 기꺼이 논쟁에 휘말리는 여성과 엄마들은 언젠가, 어떻게든, 무언가를 바꾸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럴 만하다.’


-《엄마 됨을 후회함》 중에서       






  

 

쉬잇, 가만히 있어봐

귀를 창문처럼 열어봐

은행나무가 자라는 소리가 들리지

땅이 막 구운 빵처럼 김 나는 것 보이지

으하하하하, 골목길에서 아이 웃는 소리 들리지

괴로우면 스타킹 벗듯 근심 벗고

잠이 오면 자는 거야

오늘 걱정은 오늘로 충분하댔잖아

불안하다고?

인생은 원래 불안의 목마 타기잖아

낭떠러지에 선 느낌이라고?

떨어져 보는 거야

그렇다고 죽진 말구

떨어지면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어

칡넝쿨처럼 뻗쳐오르는 거야

희망의 푸른 지평선이 보일 때까지

다시 힘내는 거야      


-〈너는 약해도 강하다〉, 《해질녘에 아픈 사람》 중에서   








        

이런 문장과 시는 단지 읽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나를 살게 했다. 밑줄 그으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되는 하루도 ‘이만하면 됐다’고 그칠 수 있었고,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의 제목만 바라봐도 나의 ‘분노와 애정’을 조금 다스릴 수 있었다. 엄마 뒤에 후회라는 감정이 밀려올 때마다 이 기분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엄마를 경험한 많은 이에게 일어나는 정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해질녘이 될 때면 아파도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었다. 교과서 공부하듯 엄마가 저작권을 가지고 편찬한 세 권의 책과 다른 여성 작가들의 책을 읽으며 나도 쓸 수 있었다.      


정돈되지 못한 감정을 아이가 아닌 빈 문서 위에 토해낼 수 있어 다행이었고, 잘 갈무리해 에세이라는 장르에 내 얘기를 실을 수 있어 기쁘다. 나도 그들처럼 내 삶을 쓰며 아이를 키우며 살아갈 수 있었다.   

  

‘자기 삶의 저자인 여자는 웬만큼 다 미쳐 있다’고 하미나 작가는 썼고,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으므로 미쳐서라도 견뎠을 것이다’라고 신형철 평론가는 썼다. 여기에는 어쩌면 미쳐서 쓴 글과 미치지 않으려고 쓴 글이 고쳐지고 다듬어져 담겨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인 나의 고통과 우울이 기록이 된다고 생각하면 조금 덜 우울해졌다. 쓰는 손가락 사이로 우울이 새어나갔다. 그래서 애써서 썼다.    





쓰는 손가락 사이로 우울이 새어나갔다

 




아이가 태어나고 내가 다시 태어났다. 그 시기를 통과한 나는 내 생의 끈이 한 번 크게 뒤틀려 매듭지어진 것만 같다. 우울 때문에 죽고 싶었다가 ‘결국 내가 살려고 우울이 왔구나’ 깨닫게 되었다. 나는 태어났으므로 기쁘고 슬프고 우울한 거니까.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일과 글과 근육 키우기를 다짐했다. 아이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임신, 출산, 육아 라는 고통이 나에게 준 각성이었다.   

   

아이를 낳고 죽고 싶었던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그때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잠깐만 죽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통증이 반복되고 아이가 끊임없이 울고 집안일이 나를 덮치고 이 모든 게 한 집에서 매일 반복되는 상황에서 죽음을 떠올리는 건 가장 쉬운 일이 되었다. 그때의 나는 어쩌면 미쳐 있고 이상했던 게 아니라 세상에 드러나지 못한 이야기를 그저 내가 온몸으로 겪던 중이었으니 지극히 당연한 거였다고, 그럴 수 있던 거라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죽고 싶었던 순간들만 모아 다시 살고 싶다’** 는 한 시인의 표현은 나에게 반만 맞다. 다시 살고도 싶지만 그랬다면 이 책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해하게 된 고통과 생명에 대한 범위는 지금보다 더 좁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밑줄 친 문장 하나를 옮겨 적으며 사랑하고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을게. 죽어도 죽지 않을게.’***          











* 《수학자의 아침》, 김소연

** 《아침의 안이》, 심보선

*** 《인생의 역사》,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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