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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서가 Aug 31. 2021

다 지나갈 겁니다, 살아만 있다면...

다큐 3일, 한강 수난구조대 72시간을 보고...

코로나 블루였던 걸까. 한동안 무기력감과 긴장감이 오가면서 마음이 힘든 날들이 있었다. 아이들 방학으로 더욱더 손발이 묶여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공생하기에는 너무 24시간 밀착 육아라서, 잠시만이라도 내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나마 아이들을 재운 후에 남편과 소주 한 잔과 소박한 안주를 위로 삼아 밤을 늘려보려 애도 썼었다.


술에 잔뜩 취했던 어떤 날이었나. 잠도 오지 않고 속은 더부룩해서 TV를 켰는데, 가끔씩 즐겨보았던 다큐 3일이 방영되고 있었다. 여느 때였으면, 진지한 이야기는 피하고 싶어서 채널을 돌렸을 텐데 취한 김에 빠져들어 보았다. 주제는, <한강 수난구조대 72시간>. 나에게 한강은 남편과 데이트 장소기도 했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기 딱 좋은 '힐링'의 공간이었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생(生)과 사(死)를 결정지으려 하는 곳이기도 하단다. 


한강 수난구조대는 한강교량을 오가는 이들을 24시간 CCTV로 관찰하면서 위급 상황에 대처하고 있다. 혹시라도 교량 위에서 생을 마감하려는 사람을 발견하면, 구조 선박은 최대 시속 90킬로미터를 달려 최대한 빠르게 출동하고 있다고 한다. 한강 다리를 사이에 두고, 세상을 떠나려는 자와 그를 살리려는 이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밤 10시부터 새벽 2시가 가장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시간이라는데, 밤이 깊어질수록 외로움과 괴로움은 더 짙어지는가 보다. 나 또한 깊고 깊은 밤 내음을 혼자 느끼며 울던 때도 있었으니까.  이 시간에는 구조대에서도 더 긴장을 하고 상황을 지켜본다고 한다. 생명의 전화를 찾는 이들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느낄 때면, 119에도 신고가 되어 경찰과 구조대가 동시에 출동을 한다고.  이 장면들을 보면서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이들의 아픔을 난 가늠할 수 없겠지만, 살리고자 하는 이들의 간절함도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느꼈다. 



https://youtu.be/kGVJBml66vY



구조대의 대원 분들은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구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생명은 소중하잖아요. 그것만큼 소중한 게 어딨어요."

"누군가의 가족이고, 아들이고, 부모님일 테니까 사명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 부분을 보며 난 한참을 울었을까. 술에 취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나 힘겨웠던 때가 떠올라서였을까.  한편에서 자고 있는 남편이 들을까 봐 숨죽여 울었던 기억이 난다. 다음날, 잠에서 깨어서도 며칠 동안 이 영상이 내내 맴돌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건 아마도, 내가 죽음의 문턱을 오갔던 때가 무의식중에 떠올라서였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 첫돌이 되기도 전에 장폐색으로 작은 배를 열었던 흉터가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기도 하고. 대여섯 살 무렵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 수술했던 자국도 여전히 남아있다. 질병과 사고로 생과 사의 기로에 섰던 그 옛날, 나를 너무나 살리고 싶었던 의사 선생님도 계셨고 눈물로 숱한 밤들을 지새우셨던 엄마도 곁에 있었다. 


그렇게 건진 목숨인데... 난 두 아이를 낳고 나서, '삶'이 버겁다며 세상을 등지려고 했었다. 산후우울증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내가 부족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들다고 여겼었다. 남들은 다 잘만 키우는데, 나만 징징댄다고 생각했다. 친정과 시댁에서 흔쾌히 육아를 덜어주는 주변 사람들이 부러웠고, 왜 나는 혼자냐고 매일 절망했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힘듦은 반복되었고, 내가 죽어야만 상황이 끝날 거라고 상상했었다. 어리석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곁에서 '나와 같이' 힘들어해주었던 남편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 육아에 허덕일 때마다 무심한 척 고생을 덜어주었던 '남동생'이 있기도 했고, '언니'라고 친근하게 불러주던 동네 엄마들도 있었다. 꾸역꾸역, 억지로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냈더니 시간이 흘러갔다. 아이들은 조금씩 각자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고 있고, 한때 괴로워 죽을 것만 같던 상황들도 지나갔다. 


'지나갔다.'

숨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도 힘든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때의 감각도, 감정도 흐릿하게만 떠오른다. 나는 한강 다리에 설 수밖에 없었던 분들을 떠올리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들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떠한 위로보다도, '나를 궁금해하는 안부' 정도만이라도 건네는 이가 있었더라면 덜 외롭지 않았을까. 세상을 살아가는 게 덜 무섭지 않았을까, 감히 짐작을 해본다.


그리고 내 곁에 '삶이 버거워' 한숨을 쉬는 이는 없는지 귀를 기울여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들이 나에게 건넸던, 결코 가볍지 않았던 '위로와 관심' 덕분에 난 지금도 '잘'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어떠한 말보다, '잘 지내지?'라는 안부 한 마디, '넌 잘하고 있어'라는 따스한 말,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고 담담한 위로를 전해봐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니까, 오래 무관심했던 나의 사람들에게 내일은 '인사'를 건네봐야겠다.


'오늘도 안녕하시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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