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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Sep 19. 2023

20 사랑의 체중을 감량하면 얻는 평온




 주는 사랑만큼 돌아오지 않아도 내 감정만으로 의미 있다 믿었던 가식의 포장이 벗겨져갔다. 사랑에 대한 미미한 신념은 힘을 잃고 주는 만큼 받고 싶다고 자백해버렸다. 곧바로 초라해졌다.



 관계에 있어 헌신적인 편이다. 상대보다 감정적으로 손해 보더라도 더 많이 표현하고 보여주는 것이 행복이었다. 스쳐한 말도 잘 기억해 내 적절한 순간 보탬이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상대의 슬픔이 1이라면 항상 10의 슬픔으로 더 많이, 그래서 더 깊게 함께 슬퍼했다. 때때로 그 사랑들이 비슷한 무게로 되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자부했다. 사랑의 질량이 비례하지 않아도 온전히 내 마음을 전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 허세롭게 말이다. 그러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할 무렵 환절기 감기처럼 잊지 않고 찾아오는 감정이 생겨났다. 억울함이었다. 적어도 이 정도는 이해해 줘야지. 못해도 이 만큼은 되돌아와야지. 하다못해 오늘만큼은 내가 우선이 되어줘야지. 적어도, 못해도, 하다못해 이 모든 표현들을 펼쳐보면 결국 되돌아오지 않은 사랑에 분노가 차오르지만 껍데기 같은 신념을 지켜내기 위해 힘겹게 참다 튀어나온 진심들이었다.


 연애에만 그치지 않았다. 친한 후배와 10여 년을 알고 지내면서 누구보다 그녀에게 좋은 언니, 인생에서 배울 점이 많은 선배로 자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의 인생이 흔들릴 때 가장 먼저 그녀의 편에 서서 무거운 짐을 나누어 들어주고 싶었다. 나와 다른 연애관을 가진 그녀였지만 줄곧 그녀의 연애이야기를 진심을 다해 공감해 주었고 업무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내 일을 미루고 그녀를 도왔다. 출근길 저기압인 날이 많던 그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온갖 에피소드를 펼쳐놓았다. 그렇게 관계가 지속될수록 어딘가 모르게 허하기 시작했고 처음엔 애정을 받기만 하는 그녀의 미성숙한 태도 때문이라 감정의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사랑과 배려를 보이면 곧이어 같은 모양의 배려가 뒤따라올 거라 생각했던 일차원적인 희망이, 나의 욕심이 나를 허하게 만든 주범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내가 주는 사랑에 의미를 내려놓아야 했다. 사랑은 받는 이가 스스로 형용할 수 있도록 내가 지정한 무게와 과대포장된 의미의 사슬을 풀어 자유롭게 만들어야 했다. 준 만큼 얻지 못했을 때의 공허함과 나만 상대를 생각한다는 착각에서 빠져나와 평온을 유지 할 냉정함이 필요해졌다.


공허함이란 감정의 8할은 내가 만들어낸 감정임을 비로소 인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내가 전하는 마음의 온도를 섬세히 알아봐 주는 이도 있다. 그래서 춥지 않게 적절히 온도를 유지해 주는 관계도 있다. 그러나 매번 그러한 개념과 어긋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회의감을 느껴왔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관계에 있어 채우고 비워내는 일정 반복을 현명하게 해 나갈 능력을 키워야 함이다. 아무리 오래된 사이라도, 내 인생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못할 운명 같은 사랑이더라도 나는 나의 숭고한 사랑이 그 귀한 존재로만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감정의 날개를 달아주려 한다.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내가 느끼던 공허함마저도 분해될 것이다. 나를 억압하던 우울도 일부 증발할 것이고 관계에 있어 나를 온전히 제어할 수 있는 성숙함과 드디어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고들을 거쳐 후배의 감정에 내 감정이 좌지우지하지 않게 되어갔다. 상대의 태도와 행동에 초연해지기 시작했고 내 마음이 힘들 때까지 온 맘 다해 애정하지 않게 되었다. 관계가 변한것이 아니다. 내가 변한것이다. 진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사랑을 다 주는 것이 아닌 내가 외로워지지 않을 만큼의 사랑을 주고 일부 내 마음에 남겨둘 때 비로소 진정한 힘을 발휘했다. 사랑은 남은 동전을 넣어 가득 채우는 돼지저금통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친구 J는 내게 종종 그런 말을 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해지는 관계들로부터 피로해질 때 '무심'을 일삼아본다고. 챙겨줘야 한다는 강박과 아껴줘야 한다는 압박이 아닌 때때로 상대들로부터 무심한 사람이 되어 관계의 숨통을 틔워주는 것. 그래서 주어진 내 감정이 덩그러니 혼자 서있는 것이 아닌 가장 필요한 순간 의미 있게 튀어 오를 수 있게 발돋움의 시간을 주는 것. 그게 가장 현명한 마음주기라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깨달아 간다.


 사랑도, 인간관계도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몸도 사랑도 적정무게를 유지해야 말그대로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것도 오래오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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