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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Sep 12. 2023

19 내가 사랑이라 일컫는 것




 서울에서 군산까지 운전한 당신도 멀쩡한데 오히려 더 피곤해하던 그날의 나였다. 피곤함을 들키지 않으려 눈꺼풀에 힘을 주며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다 근처 테이블에 축 늘어진 나를 보고 당신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피곤했구나?"


 당신의 손길과 피곤했구나 한마디에 별안간 마음이 요동 쳤다. 안 그래도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 같은 무모한 용기까지 났다. 감히 이해받기 미안한 찰나마저 이해받을 때. 묘하게 사랑이 커졌다. 이런 면까지 꿰뚫어 볼 정도로 당신은 깊이 있는 사람이구나 다시금 깨달으며 말이다.


 감정만 쫒던 어린 시절 연애에는 날 만나러 올 때 당신이 사 오던 장미꽃 한 송이가 사랑의 증표였다. 조금 더 연애를 거듭하고 나니 소란스럽지 않게 고요히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가장 거대한 사랑으로 와닿았다. 그래서 그러한 순간을 마주할 때면 겁이 났다. 당신을 어느 만큼 사랑하게 될지, 두서없이 당신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그 찬란한 모습도 어쩌면 머지않아 흩어져 더 익숙하고도 편안한 관계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그럼에도 매번 붙잡고 싶고 믿고 싶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당신에게 잔잔히 보이는 모습이길.


 


 가을바람이 선선히 불어오는 9월. 책 선물을 받았다. 그 책에서 작가는 지인에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고 '알겠어 미안해'라고 말하는 것이 사랑이라 답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현란한 형용사 하나 없지만 참 명쾌하고 멋진 답이라 생각했다. 저 짧은 말의 힘을 알기에. 작가가 진짜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사람이 아닐까 지레 짐작해 보았다.


 첨예한 갈등 앞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분노를 어렵사리 견디고 미안하다 말하는 순간은 노래의 가사처럼 '나 밖에 모르던 그 못된 내가 나보다 그댈 생각해요'와 같은 의미라 말하고 싶다. 나로 인해 마음 상했을 상대가 걱정되고 마음이 쓰이는 것. 나의 이기심을 뛰어넘는 순간, 어쩌면 진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23살의 무더운 여름, 당신은 퉁퉁 부어있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셈케이야. 내가 먼저 사과하는 건 어렵지 않아. 단지 내가 사과를 하고 나면 내 마음을 토닥여 줄 너의 한 마디가 필요해. 그래야 내가 공허하지 않아.'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당신은 참 예쁘게도 나를 조련했다. 그 당시 나로 인해 공허하다는 상대의 표현은 가히 충격적이었기에 못된 이기심을 고쳐먹으려 부단히 애썼다. 감사히도 그로부터 나는 비교적 사과에 관대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엇나갈 때도 있지만. 반면 곧 죽어도 자기 입장만 내세우며 고집부리는 상대를 보면 23살 무더운 여름이 생각났다. 그때 당신이 말한 공허함이 이런 감정이었겠군. 하면서 말이다.


  칼로 물 베기. 사랑하면 먼저 사과하라라는 일률적인 표현보다 일그러지는 우리의 미래를 미연의 방지하기 위함이라 생각하면 보다 가치 있어지려나. 구구절절 긴 문장의 문자도 무조건 울며 본인 입장만 토로하는 상황도 앞뒤 설명 없이 깊은 동굴에 들어가 혼자만의 회복을 고대하는 긴 시간도 결국 쌓이고 쌓이면 우리가 언제 사랑했던 사이였는지조차 희미하게 만들어 버리기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에 아름다운 수식을 빼고 표현하자면 나보다 상대를 더 존중할 때 보다 빛난다고 말하고 싶다. 막연히 연애라는 관계 자체의 의미를 넘어 내 삶에 또 다른 누군가를 기꺼이 받아들여 나와 비슷하게 또는 나보다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소중한 감정을 배워 나간다. 때론 그 과정에서 악랄한 내 이기심과 마주하기도 하고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깊은 감정에 감탄하기도 한다.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우리를 만들었다. 숱한 과정을 겪었기에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누군가는 '알겠어 미안해'라 정의 내릴 수 있었을 거다.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평범하지만 묵직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마음들. 사랑의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불안함이 아닌 일관성 있게 일정한 온도로 서로를 안아주는 따스함. 속상한 마음을 잠시 미루어 두고 먼저 손을 내미는 고마움. 매일 아침 건네는 익숙한 인사와도 같은, 평범하지만 그래서 소중한 모든 것들의 집합체가 결국 내가 말하는 사랑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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