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셈케이 Aug 27. 2023

18 어느 만큼 사랑했는지도 잊은 채




 보고 싶다고 서너 번 외치고 나면 우습게도 고요함을 되찾는다. 미련과 그리움은 실제 감정일 수도 있지만 인정하지 못해 잔류하다 불가피하게 뻥튀기된 가짜 감정일 때도 종종 있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미우면 밉다고 적어도 나 스스로의 감정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하여 떠난이가 돌아오거나 미움이 배가 되는 것은 아닐 테니.



 오랜만에 친오빠와 본가에서 주말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 함께 올라탔다. 두 살 터울에 남매임에도 어린 시절부터 살가운 오빠 덕에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문구점에서 아무리 울고 떼써도 엄마는 결코 사주지 않던 크레파스가 다음 날 퉁퉁부운 내 눈앞에 있었다. 어설픈 포장과 함께. 누군가 나를 괴롭히면 당장이라도 달려와 우는 날 달래주고 괴롭힌 아이를 혼내줬다. 오빠는 내게 그런 존재다. 그토록 날 아끼는 그에게 내 연애와 이별은 늘 걱정투성이었다. 내가 상처받지 않길 언제나 바래주었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행복하길 진심을 다해 응원해 주었다.


 기차는 제 속도에 맞추어 서울로 향했다.


 “자꾸 더 연애가 어려워져.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온전히 사랑하는 게 어려워지다 보니 나 자신이 작아질 때 가 잦아져. “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이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연애가 삶의 중심을 좌지우지하면 건강히지 않은 거야. 내 삶에 집중하며 잘 살아가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우연히 찾아온 인연과도 자연스레 사랑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아닌 인연은 미련 없이 떠나 보낼 털털함이 생기는 거야. 중심은 내 삶이고 연애는 그 중심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일상 중 하나일 뿐이라 생각해. 그렇다 해서 가볍다는 뜻은 아니니까. 잠시 사랑할 연인이 없다고 풀 죽어 있기엔 너의 시간이 아까워. 뭐든 재밌게 살아봐. 너도 알잖아. 늘 그렇게 시작해 왔으면서 새삼스럽네. 내 동생.”


 머쓱해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오빠는 어린 시절부터 내 모든 연애와 내 삶에 중요한 일을 함께 들어주고 공감해 줬다. 그래서 어쩌면 이성에 대한 공감의 기대치가 높았을지도 모른다. 늘 입만 열면 들어줄 준비가 되었던 오빠가 있어서. 오빠는 부모님과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낯간지러워 나도 사랑한다라 말한 적은 없지만 오빠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면 늘 마음이 가볍고 유익했다. 흐려졌던 나를 되찾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영등포역에 내려 오빠가 잡아준 택시에 올라탔다. 못내 답답하게 자리하던 감정들이 조금씩 증발되는 것이 느껴졌다. 기차 안에서 오빠에게 물었다. 곧 결혼을 앞둔 여자친구보다 훨씬 더 근사한 여자가 오빠 삶에 나타나면 흔들릴 것 같냐고. 오빠는 고민도 없이 아니라고 답했다. 누구에게든 단점은 있고 나와 맞지 않은 부분이 무조건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기에 지금 여자친구와 형성된 신뢰와 관계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으며 대체될 수도 없다며 본인 인생에 가장 가치 있는 여자라 말했다. 오빠스러운 대답이라 생각했다. 연애를 할 때 늘 진심을 다하던 오빠에게 곧 사랑스러운 아내가 생긴다. 나는 오빠의 그 따스한 마음이 괜스레 고마웠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이토록 사랑에 진심인 누군가가 나의 오빠라는 사실에 말이다.

 


 사실 사랑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 그다지 많은 고찰이 필요치 않다. 그저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가면 그곳이 사랑일 때도 있었으니까. 내 삶의 중심에 연애를 두었다 생각한 적이 없는데 어쩌면 사랑의 부피가 꽤 많이도 차지하고 있었나 보다 깨달았다. 습관적으로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도 느꼈다. 실제로 당신 없이 살 수 없긴커녕 너무나도 잘 살면서 때론 그런 슬픈 감정들이 첨가되어야 뭔가 나답게 살고 있다 착각할 때가 있었다. 다른 사람으로 잠시나마 자리를 채울 때면 새까맣게 당신을 잊어놓고선. 집에 도착할 때쯤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하, 이제 당신을 떠올리며 슬프지도 않으면 무슨 낙으로 살지'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일지라도 당신과의 추억을 끌어당겨 늘 곁에 두는 게 알게 모르게 무언의 위로였는데 이제 그마저 공허한 삶의 보탬이 되지 않았다.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신이 흐려진다. 새로운 사랑이 잘 되지 않아 흔들릴 때도 당신만큼 사랑할 사람이 없다 여기며 얼렁뚱땅 관계를 정리했는데 어쩌면 당신은 그저 내가 만들어낸 감정적 수단이 되어버렸나 보다.


 당분간 온전한 내 삶에 집중해보려 한다. 재미 붙인 운동에 더 빠져보고 바쁜 회사일을 야무지게 쳐내 볼 생각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왔던 친구들도 만나고 선선한 가을바람과 함께 혼자 산책도 해 볼 생각이다. 사랑이 맹목적이기 시작하면 사랑이 아닌 감정마저 사랑이라 여기게 된다. 내가 바라는 사랑은 그런 대체 가능한 사랑이 아니다.


 참 정신없이 흘려보낸 올 해가 반도 남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나를 사랑하는 시간으로 보내보려 한다. 이제는 어떤 당신이 불쑥 떠올라도 미소 지어진다. 어느 만큼 사랑했는지, 당신이 어떤 존재로 내 삶에 머물렀지는 희미해진다. 그래도 괜찮다. 어쩌면 더 괜찮다.

이전 17화 17 구남친 당신이 보고 싶은 여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