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셈케이 Aug 09. 2023

17 구남친 당신이 보고 싶은 여름




 모든 시간이 지나 되돌아봤을 땐 비로소 평온했으면 한다. 감정의 역동을 겪는 이 순간들도 겹겹이 쌓여 나의 새로운 원동력이 되어주길 또 소원해 본다. 거창한 척 언급하는 나의 서른둘이 어느덧 꽤 지나갔다. 올 한 해가 반이나 남았는데 왜 벌써부터 지치는 걸까. 날씨 탓일까. 흉흉한 세상 탓일까. 아니면 그저 나 자신 탓일까. 생애 첫 혼자 여행을 다녀와 편안해진 심신이 안정을 만끽하려던 찰나 바쁜 회사 업무로 다시 지쳐가는 나날이었다. 분명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나는 왜 이리 헛헛할까.


 인정한다. 당신이 아주 자주 생각난다. 인연을 만나려 노력하다 수포로 돌아갈 때마다 당신이 생각난다. 하늘이 예뻐서 바라보다 문득 당신이 생각난다. 양꼬치가 먹고 싶은 날 단연코 당신이 생각난다. 건강을 위해 새로 등록한 운동을 가기 위해 운동복을 챙기는데 또 당신이 튀어 오른다. 그 당시 운동을 열심히 하던 내게 응원차 사준 검은색 아디다스 티셔츠를 집어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왜 이렇게 구석구석 남아 있는지 씁쓸해하며 말이다.


 석 달 전쯤 당신과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았다. 커피 한잔을 하자던 당신을 거절했다. 자신이 없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정말 커피 한잔으로 끝나버릴까 봐 애당초 희망을 품고 싶지 않았다. 곧 지나갈 태풍처럼 잠잠히 고요히 당신을 지나치고 싶었다. 우린 그저 끝끝내 놓지 못해 실오라기를 붙잡고 불안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와 헤어지고 반년 넘는 시간을 조용한 본가로 내려가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 왔다는 당신의 이야기에 눈물이 날 뻔했지만 그 또한 참아냈다. 내가 버텨낸 시간들도 오로지 나의 몫이었기에 당신에게 미안하고 싶지 않았다. 각자 해내야 하는 몫, 사랑했기에 각자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이라 냉정히 여기려 애썼다.


 그게 탈이 나게 한 걸까.


 나는 말이다. 당신과 헤어지고 당신보다 더 다정한 사람도 만났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 당신과 헤어지고 당신보다 더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오는 사람을 알아갔다. 그 또한 빠르게 정리되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분명 당신과 깨끗하고 깔끔하고 정확하게 이별했음에도 왜 내 마음엔 당신을 뛰어넘는 사랑이 자리하기 이토록 어려운 걸까. 비교는 좋지 않지만 여전히 미련하게 당신이 생각난다.


 나는 결단코 당신을 잊고 싶다. 당신 없는 삶 속에서 스스로 행복을 즐기다 더 큰 새로운 사랑을 만나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관계로 안정적인 시간을 보내고 싶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주고받는 미래 이야기, 계절 흐름에 맞춰 이곳저곳 여행 다니는 시간들, 내가 가장 행복해하는 찰나들. 한 때는 평범했던 날들이 간절해지는 요즘이다. 당신을 잊지 못해서인지, 사랑을 바라보는 기준이 주제도 모르고 높아져서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당신이 너무 보고 싶다. 아무 말 없이 당신 품에 고요히 안겨 있고 싶다. 간간히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당신의 손길에 눈물이 흐를지 언정 당신의 등을 토닥이며 하염없이 당신의 품에 머물고 싶은 날이다. 퇴근 후 내게 달려와 세게 끌어안으며 어떤 순간이 와도 떠나지 말아달라던 당신의 살가운 애교가 떠오르는 날이다. 외로워서라고 인정하기엔 억울하다. 이토록 열심히 하루를 보내는 나날인데? 정말? 그저 외로운 감정이 만들어낸 허상일까? 그건 정말 아니었음 한다.



 친한 후배는 남자친구 생일을 맞이해 떠날 국내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 했다. 나는 고민 없이 공주를 가보라 말했다. 당신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떠난 여행지였다. 무계획으로 떠났지만 웃음이 끊기지 않던 우리의 시간들. 사진을 캡처해서 후배에게 전해 준 뒤 한 동안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된 걸까?


 우스갯소리로 지인들에게 참 많이도 들었다. 오빠가 다시 만나자고 하면 만날 거야? 여러 당신들 중 유독 그 질문의 대상자가 당신이라는 점, 어떤 사람이 보아도 행복하기 그지없었던 우리의 연애, 나보다 더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던 우리의 사랑. 다 내 탓인 것 같아 눈물이 나려 했다. 내가 부족해서 이렇게 된 걸까. 내가 조금만 더 어른스러웠다면 우린 지금 함께였을까. 마법 기간으로 호르몬이 뜀박질을 해서 그런지 슬픔이 순서를 막론하고 온 마음을 휘젓고 다닌다. 애써 이 혼란을 바로 잡아야 한다. 걷잡을 수 없는 미련을 잠재워야 한다.


 최선을 다했다 하지 않았는가. 결과를 받아들이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걸어 나가야 한다. 이렇게 주저앉아 떠난 이를 그리워하며 보내기엔 청춘이 아쉽다. 당신은 나보다 더 잘 살고 있을 거다. 어쩌면 벌써 나를 잊고 새로운 사랑을 할지도 모르는데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또다시 당신을 떠올리면 안 된다. 눈을 감고 생각한다.


 괜찮아. 괜찮아. 분명 다 괜찮아질 거야. 아주 많이 사랑해서, 그래서 조금 더딘 것뿐이야.


 후배는 보내준 카페 사진을 보며 연신 들떠 보였다. 그 모습에 또 피식 미소가 새어 나왔다. 후배에게도 꼭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한 여행지로 남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불현듯 나를 찾아오는 불청객 같은 당신을 눌러내려 애쓰고 있다. 미련의 감정으로 '자니?'를 감행하기엔 더 이상 무모하지 않기에. 또는 용기가 없기에. 가장 야속한 말, 시간이 약이라는 말. 오늘도 그 말에 기대어 하루를 꾸역꾸역 이겨내보려 한다.



 참 더운 올여름, 뜨거웠던 우리의 사랑도 서서히 식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길 애써본다.

이전 16화 16 우리는 사랑에 용기를 내야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