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는 때때로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 때가 있다. 나의 기대와 감정은 숭고했으나 예기치 않은 결말에 그 찰나마저 아쉽게 만든다. 내 경험의 마지노선은 그러한 어리숙함에 늘 머물러 있었다. 아픔의 시간이 지나 상처가 아물면 새 살이 돋고 난 다시 행복해질 거란 단순한 사고에 멈추어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결말은 그러한 과정을 다 거치고 나서 기대했던 과거의 순간마저 무덤덤하게 떠올리며 깨닫게 된다. 애당초 끝은 없다는 걸. 이별을 딛고 더 나아질 거란 기대마저 물거품이 돼 비참해질 때, 나는 마지막 산을 넘고 어쩌면 끝 비슷무리한 길목에 드디어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헤어지고 꽤 지난 무렵 오랜만에 당신과 나눈 두 시간의 대화가 다시금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듣게 된 최근 당신의 삶과 생각들이 상상으로만 뻗어가던 나의 호기심을 단칼에 끊어줬다. '우린 정말 특별했잖아'라는 긍정회로의 전원 버튼을 마침내 끄고 '그래 이 정도면 되었다'라며 고요히 당신의 그간 소식을 들을 수 있는 평정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잘 살고 있었다. 여전히 잔류하는 그리움이 군데군데 묻어났지만 우린 더 이상 그걸 '사랑'이라 여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당신은 말했다. 우리의 소중했던 기억은 잊지 말고 서로 추억하자고. 당신의 마지막 문장을 끝으로 대화창을 나왔다. 끈질겼던 인연에 마침표를 찍는 게 어쩜 이리 어려웠는지.
돌이켜보면 내가 만들어 놓은 과거 상자에 맞추어 당신과의 추억들이 일제히 고유한 모양으로 다듬어졌다. 그래서 마치 '당신과 같은 사랑은 다시 내 삶에 없을 거야'라는 다소 극단적인 생각을 품고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했다. 문장으론 손쉽게 써지는 글이 아프고 그립고 부딪히고 다시 무너짐을 반복하고서야 날 것의 감정을 평온히 읽어낼 수 있었다. 괜찮아지려 수 없이 다독였던 마음과 숱한 글들이 때로 허탈할 만큼 손쉽게 흐트러져 나를 힘들게 했지만 그 시간들도 최선의 일부였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다.
서른둘, 솔직히 내가 기대했던 서른둘보단 볼품없다. 남자하나 제대로 잊어내지 못해 허우적댔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보겠단 포부도 당신과의 추억이 겹치는 찰나 무너지곤 했다. 강해질 것 같았던 나의 삼십 대가 어찌 더 물렁해지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 오랜 시간 스스로를 질타하고 자책했었다. 내가 어떤 과정을 통해 당신과의 이별을 택했고 혼자의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는지 그 순수하고도 분명한 이유를 회피한 채 그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계절의 흐름 순으로 과거 사랑에 묻혀 있었다. 이윽고 무수했던 감정을 한 움큼 끄집어내며 마음먹었다. 인생의 좋은 이야기가 하나 더 생긴 거라고. 사랑은 그저 좋은 기억만 남기고 미련 없이 놓으면 된다고. 끝끝내 붙잡고 있던 건 당신이 아닌 그 시절의 나이기에 장황한 이별 글들을 써 내려가면서도 비로소 정리되지 못한 부스러기들을 당신과의 마지막 대화창에 묻어버리고 나왔다.
내 사랑은 어쩌면 일률적이었다. 사랑을 주는 것은 쉬운데 멈추는 것이 어려웠다. 사랑만 있다면 그 어떤 역경도 기꺼이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사랑하는 감정을 차마 숨기지 못했다. 사랑을 시작하는 법,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깨우치고 미처 사랑을 끝내는 법에는 미숙했다. 마트에 가 엄마가 끝까지 사주지 않으려 했던 과자코너 앞에서 꼿꼿이 과자만 바라보고 서있던 어린 시절처럼 단순했고 여렸고 순수했다. 또는 무모했다.
'그래도 당신은 내게 이런 사랑을 줬잖아'하며 작은 물병 속에 날 가두었을 때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아름다웠던 추억은 그저 추억일 뿐 상처받고 남이 된 서로에게 그 추억은 더 이상 이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걸. 친오빠는 힘들어하는 날 볼 때면 그런 말을 해주었다. 사람이 너무 소중한 걸 잃어 아프기 시작하면 평범해 보였던 순간도 이상적인 시각으로 회상하기 시작한다고. 결국 엄청난 걸 잃어버렸다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고. 새로운 사랑은 다시 오기에 너무 오래 아파하지 말라고. 그때도 미처 알지 못했다. 다 아프고 나서야 오빠의 말이 감사하게 느껴질 줄은.
이제 나는 내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어떤 감정이 나에게 행복이고 슬픔인지. 더불어 어떤 이와 이 세상을 걸어가고 싶은지. 그 무한한 질문의 끝엔 어쩌면 지금보다 나은 내가 서있을 것만 같다.
그 끝은 결국 행복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가 결국은 행복해 질거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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