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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May 18. 2023

15 우리는 결국 행복할 거예요



 

 기대는 때때로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 때가 있다. 나의 기대와 감정은 숭고했으나 예기치 않은 결말에 그 찰나마저 아쉽게 만든다. 내 경험의 마지노선은 그러한 어리숙함에 늘 머물러 있었다. 아픔의 시간이 지나 상처가 아물면 새 살이 돋고 난 다시 행복해질 거란 단순한 사고에 멈추어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결말은 그러한 과정을 다 거치고 나서 기대했던 과거의 순간마저 무덤덤하게 떠올리며 깨닫게 된다. 애당초 끝은 없다는 걸. 이별을 딛고 더 나아질 거란 기대마저 물거품이 돼 비참해질 때, 나는 마지막 산을 넘고 어쩌면 끝 비슷무리한 길목에 드디어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헤어지고 꽤 지난 무렵 오랜만에 당신과 나눈 두 시간의 대화가 다시금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듣게 된 최근 당신의 삶과 생각들이 상상으로만 뻗어가던 나의 호기심을 단칼에 끊어줬다. '우린 정말 특별했잖아'라는 긍정회로의 전원 버튼을 마침내 끄고 '그래 이 정도면 되었다'라며 고요히 당신의 그간 소식을 들을 수 있는 평정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잘 살고 있었다. 여전히 잔류하는 그리움이 군데군데 묻어났지만 우린 더 이상 그걸 '사랑'이라 여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당신은 말했다. 우리의 소중했던 기억은 잊지 말고 서로 추억하자고. 당신의 마지막 문장을 끝으로 대화창을 나왔다. 끈질겼던 인연에 마침표를 찍는 게 어쩜 이리 어려웠는지.



 돌이켜보면 내가 만들어 놓은 과거 상자에 맞추어 당신과의 추억들이 일제히 고유한 모양으로 다듬어졌다. 그래서 마치 '당신과 같은 사랑은 다시 내 삶에 없을 거야'라는 다소 극단적인 생각을 품고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했다. 문장으론 손쉽게 써지는 글이 아프고 그립고 부딪히고 다시 무너짐을 반복하고서야 날 것의 감정을 평온히 읽어낼 수 있었다. 괜찮아지려 수 없이 다독였던 마음과 숱한 글들이 때로 허탈할 만큼 손쉽게 흐트러져 나를 힘들게 했지만 그 시간들도 최선의 일부였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다.



 서른둘, 솔직히 내가 기대했던 서른둘보단 볼품없다. 남자하나 제대로 잊어내지 못해 허우적댔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보겠단 포부도 당신과의 추억이 겹치는 찰나 무너지곤 했다. 강해질  같았던 나의 삼십 대가 어찌  물렁해지는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 오랜 시간 스스로를 질타하고 자책했었다. 내가 어떤 과정을 통해 당신과의 이별을 택했고 혼자의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는지  순수하고도 분명한 이유를 회피한  그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계절의 흐름 순으로 과거 사랑에 묻혀 있었다. 이윽고 무수했던 감정을  움큼 끄집어내며 마음먹었다. 인생의 좋은 이야기가 하나  생긴 거라고. 사랑은 그저 좋은 기억만 남기고 미련 없이 놓으면 된다고. 끝끝내 붙잡고 있던  당신이 아닌  시절의 나이기에 장황한 이별 글들을  내려가면서도 비로소 정리되지 못한 부스러기들을 당신과의 마지막 대화창에 묻어버리고 나왔다.

 


 내 사랑은 어쩌면 일률적이었다. 사랑을 주는 것은 쉬운데 멈추는 것이 어려웠다. 사랑만 있다면 그 어떤 역경도 기꺼이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사랑하는 감정을 차마 숨기지 못했다. 사랑을 시작하는 법,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깨우치고 미처 사랑을 끝내는 법에는 미숙했다. 마트에 가 엄마가 끝까지 사주지 않으려 했던 과자코너 앞에서 꼿꼿이 과자만 바라보고 서있던 어린 시절처럼 단순했고 여렸고 순수했다. 또는 무모했다.


 '그래도 당신은 내게 이런 사랑을 줬잖아'하며 작은 물병 속에 날 가두었을 때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아름다웠던 추억은 그저 추억일 뿐 상처받고 남이 된 서로에게 그 추억은 더 이상 이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걸. 친오빠는 힘들어하는 날 볼 때면 그런 말을 해주었다. 사람이 너무 소중한 걸 잃어 아프기 시작하면 평범해 보였던 순간도 이상적인 시각으로 회상하기 시작한다고. 결국 엄청난 걸 잃어버렸다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고. 새로운 사랑은 다시 오기에 너무 오래 아파하지 말라고. 그때도 미처 알지 못했다. 다 아프고 나서야 오빠의 말이 감사하게 느껴질 줄은.


 이제 나는 내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어떤 감정이 나에게 행복이고 슬픔인지. 더불어 어떤 이와 이 세상을 걸어가고 싶은지. 그 무한한 질문의 끝엔 어쩌면 지금보다 나은 내가 서있을 것만 같다.


 그 끝은 결국 행복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가 결국은 행복해 질거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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