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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Apr 23. 2023

14 함께 기뻐해 줄 당신의 부재




 연봉협상시즌이 도래했다. 협상이라 쓰고 통보라 읽지만 그럼에도 작년 한 해 눈물콧물 고생한 내게 좋은 결과가 있길 또 한 번 믿어보던 중이었다. 담당부서에서 드디어 메신저가 왔다. 계약서를 손에 쥐고 올라온 직원들의 표정이 꽤 밝다. 희망적이다.


 ‘셈케이 대리 작년 한 해 좋은 평가받아서 대리급중에 제일 높은 인상률이네요?’


 진심이 아니어도 좋다. 승진 때 받은 인상률보다 훨씬 높아 입꼬리가 씰룩댔다.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총무팀 과장님께 농담 한마디도 던지고 애써 담담한 척 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직원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감정을 숨기던 찰나 문득 이 기쁨을 함께 나눌 당신이 없다는 생각에 아주 살짝 우울했다. 이럴 때 흥분 조금 섞고 과장 조금 보태 ‘나 오늘 부자 된 기분이야 말만 해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하며 까불어도 보고 싶은데 그럴 당신이 눈 씻고 봐도 없다. 보고 싶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기에 접어둔다. 최근 소개팅이 잘 되지 않아서라 생각하는 모종의 감정도 잠시 뒤로 미뤄두었다. 그저 이 순간을 나보다 더 기뻐할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한 외로운 사람일 뿐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생각나는 사람, 기쁜 일과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누굴 떠올릴까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바로 떠오르는 사람. 나는 지금 당신이 그리운 걸까, 또 다른 당신이 필요한 걸까.


 인정해야겠다. 외로워졌다. 사랑이 마구마구 하고 싶어 졌다. 사랑 가득 받아 자존감이 최상이던 상태에서 누굴 만나야 행복할까 고민만 쌓여가다 보니 나 정말 사랑할 수 있어? 불안감도 들었다. 적어도 이 불안이 서른 하고도 둘에 찾아올지 몰랐지만 말이다.


 연봉 관련 미팅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이러한 외로움에 속 앓다 문득 떠나고 싶어졌다. 평소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제주도 당일치기. 가장 친한 후배에게 묻지도 않고 당장 내일 오전 출발인 항공권과 돌아오는 항공권을 끊고 메신저로 제주도 가자!라고 말하자 후배는 장난치지 말라며 당황해했다. 항공권을 들이밀자 그녀의 반은 어이없는 표정, 반은 신난 표정을 보고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우리는 종종 여행을 떠나지만 이런 즉흥 여행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선배때문에 진짜 못살아 핀잔을 주면서도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계획 짜지 말자’

 ‘당일치기도 웃긴데 계획도 없이 가자고?‘

 ‘인생도 계획대로 안되는데 무슨’


 그녀는 그럼에도 간단한 서칭을 이어했지만 월급도 오르겠다 사랑하는 후배의 항공권을 시원스레 결제해 주고 떠나자! 말하는 나의 쿨함이 좋았다. 방금 전까지 우울해한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사랑으로 마음을 채울 수 없다면 무언가로라도 채우면 된다. 내 인생은 당신이 있던 시절, 홀로 살아가던 시절 모두 내 몫이었으니까.



 제주 바다를 보면 또 당신이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어때. 나는 지금 제주바다로 내 마음을 채우고 싶을 뿐이다.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타 그녀는 내게 우리 정말 떠나는 거 맞지? 라며 여전히 믿기지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조금씩 새어 나오는 그녀의 미소에 가길 잘했다 생각했다. 그녀와 나는 서로의 연애를 아주 잘 안다. 어떤 사람을 만나왔고 어떤 사랑을 원해왔는지 말이다. 그래서 이따금씩 우리에게 찾아온 이별 옆에서 묵묵히 함께해 주었다. 그녀는 끝까지 왜 갑자기 제주가 가고 싶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내가 좋아할 만한 카페를 찾았고 예쁜 바다로 나를 데려가주었다. 고즈넉한 금능해변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윤슬이 녹아 반짝이는 바다를 한동안 바라보다 자리를 옮겼다. 그 누구의 당신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만 생각했다. 나의 행복, 나의 평온, 나의 내일. 오로지 나를 위해 시간을 보냈다. 꽤 오랜 시간 내 마음을 온전히 다독여본 적이 언제인가 뒤돌아보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냥 괜찮아질 거라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나의 아픔을 터프하게 툭툭 쳐내고 외면해 버렸다. 그래서 인연이 찾아왔을 때 맹목적으로 좋은 관계가 되어야 한다 나를 윽박질렀다. 결국 생각과 마음이 일치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제주의 해가 저물 때쯤 그녀에게 말했다. 가장 행복할 때 소중한 약속을 하지 말고, 가장 힘들 때 묵직한 선택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나는 2년 전 제주 바다를 보며 당신과 약속했었다. 앞으로 행복한 모든 날을 함께하자고. 그리고 며칠 전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고작 두 번 만난 당신에게 관계를 그만 이어가자 고했다. 비록 가장 행복할 때 소중한 약속을 했고 그 결여를 겪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가장 힘들 때 묵직한 선택 앞에서는 나를 위한 현명한 선택을 했다. 만남이 점점 어려워지지만 그렇다 하며 중심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하게 되었다.


 여전히 어렵다. 살아가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 타인을 사랑하게 되는 그 오묘한 시작도. 때론 중심을 잃고 흔들릴 때도 있고 어긋난 관계에 마음이 뒤숭숭해질 수 있지만 괜찮다. 다시 일어나 저 바다처럼 또 잔잔히 흘러가면 된다. 바닷물이 밀려오고 쓸려가고 파도치고 윤슬을 담아 빛날 때도 우리에겐 여전히 바다이기에.



 돌아오는 비행기 안, 마음이 감사히도 평온을 되찾았다. 무뚝뚝한 그녀는 선배 덕분에 내가 더 행복했네 고마워라며 좌석에 앉자마자 말해주었다. 내가 더 고마워라는 낯간지러운 말 대신 미리 써온 짧은 편지를 전했다. 우리 삶을 찾아올 행복, 슬픔 그 가운데를 포함한 모든 순간에 서로의 존재를 잊지 말자고 고맙다고 마음을 전했다. 해는 야속하게도 금방 저물었고 나는 조금 더 나다워진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또 한 번 감정의 난관에서 나답게 일어선 나 자신에게 그래 오늘처럼 그렇게 살아가자 말하며 오랜 시간 고생하고 노력한 마음에도 고마움을 표했다.   


 물론 아름다운 제주 바다를 보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완벽히 배제할 순 없었다. 멋진 풍경을 보며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연인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와 천천히 해변을 걷는 부부, 반려견과 자유롭게 달리는 사람들. 구석구석 사랑으로 가득한 바다에서 또 한 번 사랑을 꿈꿔보았다. 먹고 싶은 거 다 사주겠다는 나의 호언에 더 호탕히 웃으며 이런 날은 내가 사줘야지 퇴근하고 만나자며 기쁨이 두 배 될 그날을 또 한 번 고대해 보았다.


 나의 혼란의 날을 제주라는 황홀한 곳에서 함께 보내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며 때때로 사랑하는 이의 부재로 외로운 날이 오더라도 함께 할 감사한 날이 더 값질 수 있도록 이 시간마저 잘 살아가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나는 잘 살아가고 있다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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