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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Aug 03. 2023

16 우리는 사랑에 용기를 내야 한다




 연애를 거듭하고 나이를 더하면서 얻게 되는 지혜 중 하나는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누군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파악이 때때로 오류를 범할 때도 있지만 어느 정도 느낌은 크게 틀어지지 않는다. 당신을 처음 만난 날 나는 느껴졌다. 당신에겐 아직도 여전히 잔류하는 상처가 있다는 것을. 상처의 모양은 결코 알 수 없지만 당신은 누구보다 행복을 원했고 그 간절함을 숨긴 채 상처받지 않기 위해 견고한 자세를 취하는 듯 보였다. 안쓰럽거나 안타깝진 않았다. 어쩌면 당신에게 나 또한 그렇게 비칠지 모른다 생각했으니까. 사랑을 할수록 이별을 할수록 인간을 알아갈수록 조금씩 움츠려지는 무언가가 있기에.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소망이 있기에.


 당신은 나를 만난 순간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몇 번의 만남을 더한 날 내게 근사한 말을 해주었다.


 '셈케이 너는 내게 태양 같아. 어둡고 고요한 내 삶을 환하게 비추며 다가왔어'


 여기까지의 글만 읽으면 우리를 이미 사랑에 빠진 연인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더 이상 달콤한 문장을 감정의 전부라 믿지 않게 되었다. 나를 보는 순간 세상이 멈추었단 당신도, 남들은 종소리가 들리는데 아무 소리 없이 나의 예쁜 미소만 보였다던 또 다른 당신도 결국 남이 되어서가 아니다. 그 소중한 말들이 가치 없었단 뜻도 아니다. 다만 어떠한 관계를 짧은 문장으로 의미롭게 만들어 앞서 사랑을 키우기엔 이미 많은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나 또한 당신을 보는 순간 그러한 생각을 했다. 당신의 가장 따뜻한 편이 되어 당신의 출처 모를 상처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고. 그리고 아물 때쯤 기다렸다는 듯이 당신에게 기대고 싶다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느낀 감정이라고 하기에 다소 의아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런 감정을 어떻게 느꼈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모르겠다. 그냥 느껴졌다. 우리가 원하는 사랑의 모양은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한강을 고요히 걷기도 하고 퇴근 후 시원한 맥주도 나눠마시며 하나씩 추억이 더해질 때쯤 우린 어떤 관계일까 생각을 했다. 원래대로라면 당장이라도 당신의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 했을 텐데 왜 이리도 마음과 머리가 기름과 물처럼 따로 흐르는 건지 당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분명 당신도 나도 서로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주고받고 있었음에도 주저하고 있었다. 왜일까. 왜 나는 당신에게 더 다가가지 못할까. 오랜 시간 고민을 했다.


 이 전 연애들은 어땠었지? 불가피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잔상들로 하여금 조금은 더 선명해졌다. 나의 주저함에 대해서 말이다. 편안함을 느끼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도 축복일지 모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편안함을 느끼기 전에, 대화가 잘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 과거 당신들에게 설렜었다. 지난 연인들과의 첫 시작은 어떠한 고민의 과정보다 설렘을 먼저 느꼈다. 그래서 시작할 수 있었고 그 후 편안함과 잘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서가 뒤 바뀐 것이다. 두 시간쯤 전화를 해도 끊임없이 대화가 가능했지만 희한하게 당신에게 설렘이란 감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설렘이 관계의 전부가 될 순 없지만 적어도 내게 중요한 요소임은 분명해 보였다.


 하루는 함께 영화를 봤다. 유난히 더운 올여름, 영화관 입구에 미리 와 시원한 음료 두 개를 들고 서있는 당신을 발견했다. 걸음을 재촉해 당신 앞에 섰을 때 나도 모르게 마음이 확고해졌다. 그 예쁜 마음을 가지고 서있던 당신을 보고 나는 어쩌면 사랑이 아니겠다 확신하고 말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어렵사리 잡은 당신의 손은 차디 찼다. 마치 우리의 미래를 암시하듯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영화를 보고 나와 연남동 길을 거닐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조용한 맥주집에 들어가 가슴속을 가득 채운 마음을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당신도 내 속도에 맞춰 당신의 마음을 꺼내보였다. 다행히도 우리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로의 존재가 분명 의미 있음을 인정하나 오묘하게 정체되는 감정선이 의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당신의 유년시절 이야기, 이 전 연애의 이야기를 듣고 역시 당신이 상처투성이란 나의 추측이 맞아떨어졌다. 당신은 이제 더는 누군가와 헤어지고 싶지 않기에 더 신중하고 싶다고, 불타는 시작은 아니어도 선명한 관계로의 시작이 어쩌면 덜 아프지 않겠냐 말해왔다. 시원한 맥주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웠다. 그냥 고마웠다.


 짧지 않은 시간을 서로 알아가며 우린 참 많은 대화를 나눴었다. 당신은 내게 마지막 그런 말을 해주었다.

 '셈케이 너는 분명 행복할 거야. 그게 내가 네 옆에 있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기도 해'

 

 이어 나는 답이라도 하듯 말했다.

 '오빠도 참 따뜻한 사람이야. 누군가 오빠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 따뜻함 때문일 거야"


 우리는 서로 칭찬해 주는 상황이 웃겨 한바탕 웃었다. 주문한 어묵은 손도 대지 않았지만 맥주잔은 늘어만 갔다. 이별 후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드디어 나도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기대에 부푼 시간들도 있었기에 고마웠다. 비록 당신과 사랑의 관계로 발전하지 못했지만 난 꽤 많은 것을 얻었다. 내게 사랑이 어떤 건지 연애가 어떤 의미인지 다시금 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잊고 지낸 이성의 칭찬으로 묻혀둔 자존감도 다시 싹을 피웠다. 좋은 사람임이 틀림없던 이와 관계를 종료하여 후회되냐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라 답할 수 있다. 분명 매력 가득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희미한 감정으로 시작하여 되려 상처를 준다는 것은 이기적이다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내가 사랑할 수 있을 사람의 온도를 느낄 수 있다. 건방일지 몰라도 난 나의 촉을 많이 신뢰하는 편이다. 사랑을 통해 얻는 행복도 그 반대의 슬픔도 어쩌면 각자의 몫 아닐까. 그렇기에 어떤 시작 앞에서도 내 감정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감정이 '가보자! 우리 가보자니까!! 응??' 사랑을 재촉한다면 망설일 필요 없이 앞 뒤 잴 것 없이 직진이다. 그러나 '아... 근데.. 있잖아.. 음.. 보자... 음.. 아니 근데 말이야?.. 아..' 멈춰야 한다. 상대의 소중한 시간을 더 이상 잡아먹으면 안 된다. 어릴 때는 감정의 변화도 무쌍하고 변덕도 심해 나도 나를 믿지 못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이별의 반복은 굵직하고 선명한 안목을 선사해 준다.


 사랑의 가치를 알아볼 안목을 말이다.



 늦은 밤이 되니 조금은 선선했다. 조금만 더 걷다 헤어질까?라는 내 제안을 기쁘게 받아준 당신과 한참을 걷다 택시를 불렀다. 아쉬운 포옹과 마지막 악수를 끝으로 여기서 인사하자며 우리는 다시 못 볼 서로를 향해 진심을 다해 안녕을 바랐다.


 가끔 밥이라도 먹을래?라는 당신의 말을 정중히 거절했다. 아무리 우리의 관계가 이곳에서 종료되었지만 우리는 사랑을 하기 위해 만났던 사이다. 다시 관계의 정의를 바꾸어 친구가 되기엔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 당신 곁에 운명처럼 찾아와 당신 가슴에 남아있는 상처를 깔끔히 씻어주고 다시 새롭게 사랑이 싹트길 바랄 뿐. 그럼에도 당신이 있었기에 무더웠던 올여름 즐거운 추억하나를 만든 것 같아 고맙다고 이 글을 빌려 전해본다.


 사랑은 참 어렵다. 누군가를 가슴에 품는 것도 참 어렵다. 사랑이 하고 싶다하여 매력적인 상대를 턱! 하니 눈앞에 내려다 주어도 사랑에 빠진다 보장할 수 없다. 사랑이란 감정은 오만가지 감정과 타이밍이 더해져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아니었다고 생각한 인연들이 지나가 때론 지치는 순간도 오겠지만 난 여전히 낭만을 꿈꾼다. 우리 모두 결국 사랑하는 이를 만날 거라는 낭만 말이다.


 사랑한다 고백하는 순간만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랑이 아니라고 느낀 순간 과감히 관계의 스톱 버튼을 누를 줄 아는 용기도 때때로 필요하다. 그렇다 하여 사랑을 포기하지 말자. 쉬울 리가 없다. 그래서 더 가치 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에겐 시원한 음료 두 잔이 사랑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태양 같다는 달콤한 말이 사랑일 수 있다. 각자의 사랑이 부합하는 상대를 만나는 기적이 머지않아 일어나길 바라며 잠시나마 내게 머물다 간 당신에게 고마움을 남겨본다. 끊임없이 사랑을 꿈꾸는 당신과 나의 용기가 결국은 또 새로운 사랑을 맞이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길 더불어 바라본다.


 한 뼘 더 사랑을 알게 된 7월의 끝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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