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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 Jul 23. 2022

너 뭐 돼? 오만한 테린이의 최후

7. 현타 정통으로 맞은 이유  




지난 대회의 쓰라린 기억이 채 아물지 않았지만 사람은 사람으로 잊듯 대회도 대회로 잊으려 2주 만에 다시 출사표를 던졌다. NTRP별로 치르는 대회였는데 한 지인은 아무리 봐도 내가 NTRP 1.5는 아니라며 2.0을 나가라고 했고, 다른 지인은 대회에는 자격 요건보다 출중한 이들이 나오기 때문에 1.5로 나가도 쉽지 않을 거라 했다. (심지어 0.5가 있으면 0.5로 나가라고 했다. 아니 이 사람아 라켓 잡으면 1.0이라고) 실력별로 나눠서 진행되는 게임이었고, 심지어 1.5였기에 이번엔 거뜬하지 않을까란 기대감을 갖고 공공연하게 내 목표는 우승이라고 공언했다. 파트너도 운 좋게 잘 구해서 대학 동아리 출신에다 볼발도 좋은 분과 나가게 됐다.      



아침에 날씨가 흐렸고 중간에 비예보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 게임을 하는 도중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파트너가 구력은 오래됐으나 첫 대회, 첫 게임이라 긴장을 많이 했다. 손까지 덜덜 떨렸다고 한다. 원래 스트로크가 좋은데 자신 있게 치지 못하고 네트에 걸리는 공이 많았다. 첫 번째 게임은 우리가 따서 앞서 나갔는데 두 번째 게임 노에드에서 내가 친 볼이 분명히 인인데 상대팀에서 아웃콜을 불렀다. 오픈코트 엄파이어도 없었고, 계속 언쟁을 하기도 뭣해 그냥 알았다고 했다. 상대보다 잘 친다고 생각해 한 게임 정도 양보해도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나중에 큰 오산이었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다음 게임 때는 승기를 잡았으나 결과적으론 역전패를 당해 졌다. 파트너가 평소 같지 않게 에러를 많이 하긴 했으나 전혀 잘 친다는 생각이 안 든 상대에게 6대 4로 지니까 조금 황당했다. 게다가 빠른 경기 진행을 위해 2대 2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끝난지도 모르게 경기가 끝나버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상대가 못 쳤던 게 아니라 에러 없이 최대한 차분히 공을 잘 남겼고,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하게 만들어 에러를 유발하게 하는 고단수들이었던 것 같다. 코치님이 테린이들 게임에선 자꾸 뭘 하려고 하지 말고, 차분하게 공부터 넘기라는 데 그 말을 잘 따른 표본이었다고나 할까.      





첫 게임 때는 시간 없다고 몸도 못 풀게 해서 서브 2개 연습하고 바로 시작했는데 첫 게임에서 박살이 난 뒤 이건 아니다 싶어 어떻게든 몸을 풀 방도를 찾기로 했다. 그러다가 레슨 하는 코트가 잠깐 비길래 코치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연습을 했다. 파트너는 게임 때와 달리 원래 스트로크가 잘 나왔고, 나는 공이 아웃돼도 되니까 원래 치던 대로, 후회 없이 하고 싶은 것 다해보고 가자고 했다. 지면 집에 가야 해서 심적 부담은 전보다 컸으나 운 좋게도 내가 끝낼 수 있는 찬스 볼이 많이 왔다. 파트너가 본인 컨디션을 회복해 좋은 스트로크로 기회를 잘 만들어준 덕분이었다.     



상대팀이 나의 끝내는 발리로 실점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지옥의 로브가 이어졌다. 왔다 갔다 힘들었는데 둘 다 정신이 없어서 경기에 마실 것도 안 가져와서 난감했다. 게다가 갑자기 날이 개서 강한 햇빛으로 고통받았다. 될 수 있으면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던 차에 계속 승기를 잡으며 점수 격차가 점차 벌어지자 둘 다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감 있게 칠 수 있었다. 그 기세가 이어졌던 게 승리의 원인이었다. 사실 쉽게 이긴 게임은 기억이 세세하게 나질 않는다. 그래서 진 경기에서 더 배울 게 많은 듯하다. 그래도 상대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한 공 한 공 열심히 쳤고 그 모습이 멋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동남아 지역의 ‘스콜(일시적으로 강하게 내리는 비)'을 연상케 하는 강한 소나기가 계속 중간중간 내려 경기가 중단됐다. 기약 없는 대기가 이어지자 점심을 먹고 왔다. 오전 8시에 왔는데 오후 4시쯤 세 번째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초반에 파트너가 다운더라인, 로브를 잘해 위닝샷이 많이 나왔고 우리 팀으로 기세가 넘어와 4대 2로 격차가 벌어졌다. 이대로 승기를 잡나 싶었는데, 진상이 등판했다.      





그것은 바로 나였다. 파트너는 스트로크도 잘 치고 앞에서 침착하게 발리도 잘하는데 내가 에러를 엄청 하기 시작했다. 후위에 서서 스트로크 대결을 할 때 공이 생각보다 세게 오자 당황했고, 타점이 밀려서 에러를 몇 번 하니까 멘탈이 흔들렸다. 그러다가 전위로 나갔을 때 발리를 하다가 또 에러를 몇 개 하니까 예전에는 ‘공 오기만 해 봐라’의 마인드였는데 ‘제발 나한테 오지만 말아라’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는 날 발견했다. 상대팀이 스트록이 좋다 보니 내가 끝낼 수 있는 발리를 할 공도 거의 안 생겨 주눅이 들었다. 주눅이 들고 위축된 플레이를 하자 파트너에게도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이돼 분위기가 넘어갔다. 내가 멘탈을 잡고 둘이 파이팅을 했으면 이길 수 있었을 게임인데 중요한 두 세트를 거진 나의 에러로 까먹으면서 결국 6-4로 역전패당했다.    



테린이 대회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시며 내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은 한풀 꺾였다. 그간 나와 비슷한 구력이나 3~4년 차와 칠 때는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기량을 펼쳤고 멋진 위닝샷도 많아서 내가 남다른 줄 알았다. 그러나 실력이 점차 올라가고 나보다 잘 치거나 비등한 실력의 사람들과 치다 보니 내가 원하는 찬스 볼은 거의 오지 않았고, 그러다가 무엇을 하려고 하다 보니 에러가 늘었다. 세게 치고 위닝샷을 많이 하는 게 잘 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구력이 오래되거나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팀들을 가만히 보니 파워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상황에 맞는 구질의 공을 원하는 방향으로 들어가게 치는 정교한 플레이를 할 수 있느냐가 핵심 키였다. 구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처음엔 상대를 봤을 때 “생각보다 공이 약하네?”였는데 아웃되거나 에러가 나는 공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또 구력이 오래된 분들은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기량 발휘가 안될 때 그 상황을 수용하고 더 나빠지지 않게 차분한 운용을 하는 반면, 나 같은 테린이들은 쉽게 멘탈이 부서지고, 또 쫄리다보니까 일단 넘겨야 하는 상황에서 공을 더 강하게 치는 등의 급발진을 했다.      





나랑 비슷한 시기에 테니스를 시작해서 열심히 친 한 지인이 일 년 전쯤에 옆 코트에서 치고 있는 구력 10년 이상된 아주머니들을 언급하며 “우리가 세게 치면 이기겠는데?”라고 말했던 게 뇌리에 스쳤다. 나도 그때 일견 동감하는 바가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열심히 친 운동신경 좋은 20~30대 1~2년 차의 착각이었구나를 알았다. (Feat. 망상에 빠졌던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였어) 체력이 기반이 되고 내가 모든 걸 결정하고 컨트롤하는 단식에선 젊음과 파워가 크게 플러스가 될 수 있겠으나 복식은 파트너와의 호흡이라는 또 다른 변수가 있고 짬(?)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들은 1~2년 차에 레슨을 받고 열심히 치면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정체기에 부닥친다. 나 역시도 라켓을 잡은 시점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레슨을 받았고, 꾸준히 쳤는데 요즘에는 실력이 썩 늘고 있지 않는 게 느껴진다. 실제로 내가 6개월 차 때 게임하는 걸 보고 굉장히 잘 친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보니 거기서 크게 발전한 거 같지 않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현타가 왔다. (그동안 쓴 시간과 돈이 얼만데... 하하) 물론 기량이 컨디션에 따라 다르고, 날 잠깐 본 상대의 말의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으나 느끼고 있던 것을 적확하게 말해 뼈 맞은 기분이었다.      



어영부영 생각 없이 치는 물구력만 쌓이면 시간이 갈수록 퇴보할 수 있겠다는 위기감도 들었다. 또 내가 운동신경이 있으나 장기적 관점에서 내 구력보다 조금 잘 치는 건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예전에는 “구력이 얼마 안 됐는데 되게 잘 치시네요”란 말에 기뻐했다면 이젠 그 말이 의례적인 칭찬이기도 하고 또 내 실력이 그리 대단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쉽게 우승을 거머쥘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나갔던 대회를 통해 승리의 기쁨 대신 겸허한 자세를 배우고 왔다. 유튜브 영상에서 국화부 대회를 보며 우리나라 동호인의 수준을 걱정했던 게 얼마나 오만이었는가! 역시 보는 것과 직접 플레이어로 뛰는 건 천지차이다.  이제 그분들의 실력과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 노고를 존중하고 존경한다.      





결국 운동이든 사랑이든 자신을 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내가 강한 스트로크와 끝내는 발리가 강점이라면 상대는 깊은 코스로 공을 잘 주거나 각내는 발리를 잘하는 등 다른 좋은 강점을 갖췄기에 누가 월등히 뛰어난 게 아니다. 대회에서 파트너의 실수에 화가 나고 내 실수에 위축되며 일희일비했던 건 결국 우리가 고만고만한 실력이었기 때문이다. 월등한 실력과 인성을 갖추면 좀 더 초연할 것이다.


 초반에는 ‘나보다 못 치는데 어떻게 이겼지’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결국 내 수준에서는 에러를 줄이고 멘탈을 관리하는 게 관건인 걸 깨달았다. 예전만큼의 불타는 열정은 사그라들었지만 대신 그 자리에 냉철한 현실 인식이 자리 잡았다. 파트너의 실수에 화가 나고 실수하는 파트너가 돼 미안함을 느끼면서 많은 걸 배웠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알게 된 것-이게 바로 ‘구력’이자 경험치이기도 하겠다. 다시 오만한 마음이 삐죽이 고개를 들쯤 내게 이 한마디를 해줘야겠다.








“너 뭐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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