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이 팀은 나에게 가혹하다.
다시 한번 말하면, 인턴생활이 힘들었던 이유 중 6할은 바나나 언니였다. 그럼 도대체 4할은 무엇일까?
설명을 위해 내가 근무했던 팀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보려고 한다.
일단 팀장님보다 직급이 높은 실장님. 대학 다닐 때 미식축구를 했다는 그는, 훤칠한 키에 누가 봐도 포스가 있는 스타일이었다. 호감형 인상에 성공지향적이라 꽤 젊은 나이에 그 자리에 올랐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 무진 애를 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담당하는 실에서 발생한 성희롱 때문에 극대노를 하고 사람들을 쥐 잡듯이 잡았던 것이다.
반면에 부하 직원들을 돌보는 센스는 거의 없었다. 단적인 예로, 성희롱 사건에 대한 처리 방식을 봐도 그렇다. 그 와중에 나에게 불어 대리시험을 보게 하는 것도 충격적이었다. 전해 듣기로는, 지금은 더 좋은 다른 회사로 이직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 다음.
팀장님은 정말 잘생긴 사람이었다. 누가 봐도 잘생긴 외모 덕분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약간 호감가는 타입이었다. 그래서인지 팀장 치고 나이가 어렸다. 팀원 중에 팀장님 선배가 몇 명이나 있었고, 그는 이를 늘 부담스러워했다. 팀 내의 갈등을 눈치로 느끼고 있어도 외면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거의 식사는 혼자 하셨다.
사실 실장이나 팀장이 나 같은 인턴에게 직접적인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본격적으로 스트레스 요인을 소개하자면,
제일 먼저 내 사수. 팀장님 보다 선배인 직원 중 하나로, 하얀 얼굴에 듬성듬성한 머리카락과 통통한 배가 푸근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은퇴할 때가 거의 다 된 그는, 일본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일본어를 잘하는 것은 알겠는데, 여기서 문제는 내가 일본어를 못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현수씨, 어떻게 한국인이 일본어를 못해?"
"(한국인이면 한국어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아...제가 배워본 적이 없어서..."
"일본어는 그냥 기본적인 한자만 알면 술술 풀리는 언어야. 불어는 할 줄 알면서 왜 일본어를 못해?"
"(불어랑 영어 하면 된 거 아니냐?)..."
그는 늘 이런 식으로 궤변을 늘어놓았다. 또한, 일본어 덕분에 본인에게는 신사적인 습관이 몸에 그대로 배어 있단다. 이런 모습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그는 늘 차를 즐기며 "좋은 아침~"과 같은 인사를 했지만, 본인이 원하는 소모품을 구매하지 못했을 때는 사무실 벽에 생수병을 던지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조금이라도 일이 뒤틀리면 욕을 하거나 키보드 위에 주먹질을 해대서 자판이 튕겨 나오기도 했다. 그런 그를 늘 서포트해야 하는 나는 늘 잔뜩 쪼그라들었다.
그는 교육이랍시고, 내게 본인의 사업 결과보고, 출장 결과보고 등을 쓰게 했다. 내가 하지도, 가지도 않은 일이어서 막막했는데 왜 그렇게 꾸역꾸역 그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고맙다며 그는 내게 밥을 사준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밥 먹으러 가서 비싼 메뉴(13,000원)를 시켰다고 질타하면서 갑자기 내 메뉴를 같이 나눠 먹었다. 혼자 먹어야 하는 메뉴를 두 명이 먹게 되면서 그날은 하루 종일 허기졌다.
나를 성희롱했던 주임도 팀원이었는데, 그의 이름은 권성배였다. 여가 시간을 주로 운동으로 보낸다는 그는 체격이 건장했다. 그는 꼭 나이 많은 여자 후배에게는 ‘야, 너’ 등 반말을 했고, 나이 많은 남자 후배에게는 ‘형’이라고 불렀다. 후배인 여자들에게는 나이와 무관하게 처음부터 반말을 시작했고 ‘멍청한 년’, ‘허벅지 굵어서 보기 싫다.’는 등의 인격모독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해서 따졌더니, 그의 대답은? ‘억울하면 선배 해.’. 여자 후배가 내놓는 모든 의견에 대해 ‘억울하면 선배 해.’로 일관해서, 그의 별명은 '권선배', ‘억울하면 '성배'해.’였다. 모든 선배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성배’라서 이상하다는 의미였다.
권성배 주임이 팀 내에서 형이라고 하며 따르는 사람도 퍽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 형은 ‘무조건 돈 많은 여자랑 결혼할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점을 보고 왔다면서 회사 휴게실에서 날 불렀다.
“현수씨, 점 본 적 있어?”
“아니요? 점 보셨어요?”
“어. 얼마 전에. 근데 아 이거 도대체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서. 한 번 현수씨가 들어볼래?”
“네. 어떤 얘긴데요?”
“점쟁이가 그러더라고. 내가 무조건 돈 많은 여자랑 결혼한다고. 그런데 여기 이쪽은 완전 포기해야 된다는 거야.”
그러면서, 그는 본인의 손으로 얼굴을 가리켰다.
“얼굴이요?”
“어. 얼굴은 완전 포기해야지 부자랑 결혼할 수 있다는데. 그래도 포기하기가 그렇잖아?”
“아...”
“근데 내가 지난주에 선 봤는데 딱 그 점쟁이 말이 맞는 거야. 돈 많은 여자라서 선보러 갔더니 얼굴이 완전 어휴...아 이거 어떡해야 해?”
나는 그의 질문에 해줄 답변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얼마 뒤에, 그는 그 선봤다던 여자랑 결혼 준비를 시작했고, 현재는 그분이랑 결혼한 상태이다. 결혼하기 직전까지도 ‘얼굴이 진짜 못생겼다느니, 결혼하면 룸싸롱 자주 갈 거다.’ 하는 소리를 팀 내에서 공공연하게 했던 사람인데, SNS를 보면 ‘완성되지 않았던 내 인생의 퍼즐의 한 조각을 맞춰준 사람’ 이라든지, ‘내 요리를 누군가가 맛있게 먹어주는 행복’, '행복을 알려준 사람.' 같은 말도 안 되는 글들을 올리고 있다.
또 다른 팀원 중에는 지독한 공주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공주라고 부르며, 본인의 사무용품에 Princess라고 써두었다. 긴 생머리와 찰랑거리는 치마를 주로 입는 그녀는 나이는 꽤 있는 편이었는데, 나를 비롯한 팀 내에 있는 후배들 모두가 본인을 챙겨주기를 원했다. 본인이 그 자리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면 갑자기 어느 순간 삐져있었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후, 기분 안 좋은 일이 있는지 물어봐도 ‘나 기분 괜찮은데?’ 하면서 자리를 떠 버렸다.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깜짝 파티를 준비해야 했다. (과하면 안 되고 소소해야 했다.)
“주임님, 이거 케이크인데 주임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사 왔어요. 같이 먹어요!”
우린 주임님이 없으면 재미가 없고, 주임님이 우리의 리더와 같다는 식의 멘트를 계속 날렸다. 그러면 주임님은 ‘나 정말 괜찮았어.’ 하면서 그제야 피식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생일이라든지, 어쨌든 뭔가 기념일이 있으면 그녀에게 선물, 손으로 직접 쓴 카드 등을 주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런 카드나 선물들은 그녀 자리에 있는 진열대에 올라가게 되었고, 그녀는 진열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며 ‘너희 덕분에 내 마음이 따뜻해.’와 같은 글을 올렸다.
늘 삐지고, 달래줘야 하는 그녀의 성격은 나를 피곤하게 했지만, 특별히 큰 곤욕을 치렀던 적이 있다. 프린세스는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오래해서 영어를 꽤 잘하는 편이었고, 그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영어 녹취 파일 중에 잘 안 들리는 부분이 있다며 확인을 부탁했고, 그녀는 흔쾌히 그 파일을 듣기 시작했다. 한참을 되돌려서 다시 듣고 또 들었는데, 잘 안 들리는지 “이거는, 어떻게 방법 없겠는데요?”라고 마무리가 되었다.
“아, 이거 확실히 잘 안 들리긴 하지?”
“네. 이 정도면 다들 듣기 어려울 거 같은데.”
“현수한테 한 번 부탁해볼까? 요즘 애들 영어 잘하잖아.”
당시 난 바나나 언니 때문에 토익 만점자로 소문이 나있던 상태였는데, 아무리 해명해도, 사람들은 나를 최소한 만점 비슷한 수준의 영어 실력을 가진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쨌든, 그 사람이 나에게 영어 파일 청취를 부탁하려고 하자, 프린세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현수도 별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프린세스의 바람과 다르게 그는 내게 청취를 부탁했고 눈치 없었던 나는 좋다고 그 파일을 듣기 시작했다. 근데 웬걸? 내 귀에 들리는 영어 문장은 너무 명확했다. 그래서 나는 눈치 없이 정답을 말해 버린 것이다.
“어! 그게 맞는 것 같네! 그럼 앞 뒤 문장이랑도 딱 들어맞네! 회의록 정리하는데 꼭 필요했는데, 고마워~ 봐, 요즘 애들 영어 잘한다니까?”
이 사건으로 인해서 난 프린세스에게 꽤 오랜 시간 미움을 받다가 겨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뭔가 거슬리는 게 있으면 그녀는 틱틱거리며 팀 내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고, 팀장 정도를 제외한 많은 팀원들이 그녀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이런 그녀도 권성배 주임보다는 후배였는데, 그래서 마음대로 반말하고 욕하는 권성배 주임이 가끔은 부러울 때도 있었다.
물론 의지하고 지낸 팀원도 있지만, 빌런의 숫자가 압도적인 이런 상황에서 바나나 언니가 그 만행을 펼치고 있었으니 인턴인 나의 멘탈은 제정신인 날이 없었다.
확실히 이 팀은 나에게 가혹했다. 어쨌든 난 이렇게 짧은 인턴 생활을 마쳤다. 짧았지만 강렬했고 이 경험을 토대로 사회생활도 담담하게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